[기고] '탄소중립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입력
수정
지면A22
현혜정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탄소중립이 환경 보호를 넘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명분이 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같은 관세 형태부터, 탄소중립 핵심 원자재의 국내 조달 확대를 조건으로 지급되는 보조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통상정책 수단의 ‘착한’ 명분으로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환경과 결합한 새로운 보호무역 기조는 자유무역의 수혜자였던 한국에 큰 공급 충격 요인이다.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CBAM 도입만으로 국내 알루미늄은 13.1%, 철강 12.3%, 시멘트·비료는 1.8%의 수출 감소가 예상된다. 우리 기업들은 ‘2050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기술 개발과 에너지 전환 등에 연 수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비용 투입은 물론 배출권 가격 상승, 보호무역주의로 인한 비용 상승 압박까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피해가 집중될 것으로 우려되는 1차 금속, 전기공급업, 비금속광제품, 화학물질·화학제품 등 고탄소산업은 한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6%로 미국, 일본, 독일 등보다 높다. 이런 핵심 기반 산업의 경쟁력 약화는 연관 산업에 대한 부정적 파급 효과로 이어져 제조업 생태계가 큰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국 산업 보호와 육성을 동시에 꾀하고 있는 주요국에 비해 한국은 산업 생태계가 겪을 타격에 대한 안전장치가 매우 빈약하다. 정부는 2030년까지 4대 업종에 9352억원을 투자해 탄소저감 기술을 개발한다는 계획이지만, 연간 조단위로 요구되는 기술 투자 비용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적다. 로드맵에서 필수적인 전력 문제와 핵심 자원 확보도 걸림돌이다. 그린전력 전환에 필요한 업스트림과 기반 산업의 연구개발(R&D) 세액공제, 경제이행채 등을 활용한 재생에너지 전환 등 현실적인 이행 계획을 세워 대규모 지원 정책을 펴고 있는 일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탄소중립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 과제다. 장기적으로는 탄소감축 목표가 강제적 혁신의 유인이 돼 오염재의 환경재로의 전환을 앞당겨 환경과 산업의 윈윈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전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 장벽 극복을 위한 기술 개발, 핵심 원자재 확보 등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고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업과 산업 생태계가 붕괴된다면 탄소중립은 오히려 환경과 산업 모두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 있다.
탄소중립 문제가 양질의 삶의 문제라면, 산업 경쟁력은 생존의 문제다. 선택은 두 가지다. 피해 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대내외 지원 또는 탄소중립 속도 조절이다. 산업 경쟁력을 담보하는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만들 수 없다면 탄소중립은 공허한 외침이자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