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설국에 닿기 전까지 지나친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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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 국경의 긴 터널 옆에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는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해서 독서에 큰 뜻이 없는 사람들조차 다 압니다. 그런데 문득 작품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자 주인공이 도달하게 되는 ‘설국’보다 그 ‘터널’속 풍경과, 단지 통과하느라 지나쳤던 주변에는 어떤 마을이 자리 잡았을 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 작은 풍경과 오래된 기억
여행을 시작한 후 목적지만을 향해 무심코 풍경을 지나칠 때마다, 어쩌면 보물 같은 장면들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인가 ‘랜드마크’라는 이름의 목적지 보다는 그곳까지 ‘이르는 길’에 더욱 관심을 둡니다.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가 된 것 마냥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사실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비밀통로)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는지, ‘호랑이 간판’과 같이 옥외광고물의 좌우 배치가 바뀌진 않았는지 등 사소한 장면을 주의 깊게 보다가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하며 마침내 도로의 끝에 이를 때, 멀리 목적지인 도심의 불빛조차 환영 인사처럼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한번은 호주 멜번 인근의 와인농장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도심서 와인농장으로 이동하며 바라보는 풍경은 황량하기보다는 푸근하고 목가적이었습니다. 길이 놓였고 농장과 목장이 있으니 그 곳을 아웃백(outback,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오지 奧地)으로 분류하기는 어렵겠지만, 순간적으로 요절한 여행작가 브루스 채트윈이 우리에게 전한 ‘송라인(songline,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땅을 지도 대신 악보로 만들어가며 불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이 떠올라 반가웠습니다.멜번서 시드니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착륙 직전 바라본 장면도 도시의 명물인 ‘오페라하우스’나 ‘하버브릿지’의 바로 앞에 서는 것보다 더욱 큰 생생함을 줬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페라하우스가 정말 실재하는구나’하는 놀라움을 느꼈죠. 만약 이동하는 시간을 딴 생각으로 보냈다면 그 감동은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 기억의 저장소(애프터양과 메모리 뱅크)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한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 <애프터 양(2022)>에는 인공지능(안드로이드) 로봇 ‘양(이름이 ‘양’입니다)’이 등장합니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양이 떠나간 이후’에 비로소 영화는 시작됩니다. 인공지능 로봇이었던 ‘양’의 기억저장소를 열람하며 함께 세월을 보냈던 가족은 눈물을 흘립니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양’을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아쉬움도 컸을 터이지만, 기억 저장소에 보관된 영상을 보며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우주의 별처럼 펼쳐진 ‘양’의 기억 저장소에는 인간 가족과 얽힌 추억이 담긴 장소를 비롯해 ‘그야말로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 가득 차 있습니다. ‘양’은 ‘숲의 녹음’, ‘벽에 드리워진 아침 햇살과 나무 사이로 지는 해넘이’를 소중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장면의 배경음악은 무려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는데, 그래서 애절함의 잔상이 더욱 크고 오래 남게 됐습니다.다만, 영화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장면이 아니었더라도 오랜 사진 귀퉁이 한 켠마다 볼품없이 쌓아 놓은 책 더미, 낡은 책상과 식탁, 빛 바랜 장난감이나 청소도구, 차려 입지 않은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 등이 우리를 더욱 아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의 기억 저장소인 뇌가 안드로이드의 메모리 카드처럼 체계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지만,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마음 속에 계속 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사라지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