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면서도 다른 조성진과 임윤찬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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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성우의 클래식을 변호하다슈만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인 A단조 협주곡은 원래 슈만이 1841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 악장의 판타지 곡으로 작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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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그리그가 독일 유학시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가 연주하는 이 협주곡을 듣고 감동하여 이 협주곡과 조성도 같고, 전반적인 악상의 구성과 형태에서도 닮은 점이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이야기는 유명한데, 그로 인해 과거 음반에서는 이 슈만의 협주곡과 그리그의 협주곡을 커플링하여 발매된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클라라 주제
이 곡은 슈만 특유의 아기자기한 리듬과 함께 매우 섬세하고 우아한 선율이 넘쳐흐르는 2악장 등 사랑의 정서로 가득한 곡의 분위기도 너무 아름답지만, 위로 상승하는 힘있는 음악적 소재를 중심으로 매우 밝고 화려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3악장에 이르기까지 전 악장에 걸쳐 듣는 사람이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이 흠뻑 음악에 빠져들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곡이 바로 이 협주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아시다시피 슈만의 협주곡은 그리그의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서주 없이 도입부에서 아주 강렬한 피아노의 연주로 바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래 악보에서 보듯이 피아노가 위로 치고 올라간 후 날카로운 리듬과 함께 열정적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마무리되는 이 도입부에서 악보에 기재된 쉼표의 공간(아래 형광색 표시 부분)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여기서 페달을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사용하는 경우 이 쉼표의 공간들이 무너지면서 음향도 선명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쉼표의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독특한 음악적 느낌이 제대로 잘 전달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쉼표의 공간의 느낌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연주자들로는 과거의 거장 켐프나 플라이셔, 요즈음 젊은 피아니스트 가운데는 슈타펠트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켐프
플라이셔
슈타펠트
이 피아노 도입부의 첫 울림만 들어보아도 연주자가 곡을 어떻게 풀어갈지 그 방향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데, 리파티, 리히터, 제르킨 등 아주 탁월하고도 감동적인 연주를 남긴 피아니스트들의 경우를 보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연주에 비해) 이러한 쉼표의 공간을 의식하는 연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리파티
리히터
제르킨
이에 비해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페달의 과한 사용으로 이 쉼표의 공간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마치 음들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연주하는데, 특히 코르토 등의 연주는 (물론 여전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연주이지만) 이런 악보상의 슈만의 지시와는 좀 거리가 있는 자유로운 해석으로 위에서 언급한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스타일과는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르토
코바셰비치
페라이어
공교롭게도 최근 조성진과 임윤찬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에 이어) 슈만의 이 피아노 협주곡도 동시에 무대에 올리고 있어서 서로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위의 도입부의 위 부분과 관련하여 그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비교해보면, 둘 다 표현력은 참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게도) 위에서 말씀 드린 쉼표의 공간을 충분히 살려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페달의 사용과 관련이 있는데, 아래 임윤찬 리허설 영상을 보면 시작 부분에서 페달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렇게 페달을 사용하다 보면 슈만이 악보에 기재한 (매우 절박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쉼표의 공간은 잘 표현되기 어렵습니다.
임윤찬 (리허설 장면)
https://youtube.com/shorts/HvzhbIUMwC8?si=ufUoe_eN0JJFbxwS
조성진
임윤찬
한편, 이러한 피아노의 강렬한 도입부에 이어 짧은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클라라의 주제를 연주하고 곧 피아노 솔로가 이를 이어받아 아래와 같이 연주하는데, 여기서도 악보의 지시는 극도로 섬세합니다.특히 첫 fp의 울림을 보면 높은 음역에서의 8분음표는 매우 짧고 강하게 울려 f를 표현하지만 곧 갑자기 p로 뒤나믹스가 줄어들면서 (그 후 크레셴도 디미누엔도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반적으로 아주 여리고 섬세한 울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매우 여린 분위기에서 (파란색 밑줄 부분과 같은) 크레셴도 후의 스포르찬도의 표현이나 (빨깐색 밑줄 부분과 같은) 꾸밈음의 아티큘레이션 등도 섬세하여 피아니스트의 표현력과 스타일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조성진이나 임윤찬의 경우 전체적인 뒤나믹스가 p의 영역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좀 타건이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느껴지는데, 꾸밈음 등은 아주 잘 강조하여 표현해내고 있습니다(아래 영상 참조).
임윤찬
조성진
이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비교해보면, 전반적인 프레이징이나 아고긱의 측면에서 조성진은 시적인 표현을 위해 루바토를 좀 더 가미하는 느낌이고 그에 반해 임윤찬은 (더 어린 나이임에도) 구조적 안정감은 더 느껴지는 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난 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도 강조하여 설명 드린 적이 있지만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역시 아래와 같이 스타카토(파란색 부분)와 레가토(빨간색 부분)의 아티큘레이션의 명확한 대조를 지시하고 있는 대목이 군데군데 많습니다.솔로 파트의 스타카토를 (아래 플라이셔의 연주와 같이) 정확히 표현할 때는 그에 의한 강렬하고도 다이나믹한 음악적 표현이 가능합니다.
플라이셔의 스타카토
그리고 이어지는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대조 역시 이를 정확히 구분하여 표현할 때는 음악적 뉘앙스가 훨씬 더 잘 살아납니다(espressivo). 코르토 등 올드 스쿨의 피아니스트들은 이런 부분에서 아예 템포 루바토를 사용하여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대조를 살리려고 시도하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는 굳이 그 정도로 과도한 표현은 아니더라도 핑거링과 페달만 적절히 잘 조절해도 충분이 위의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대조를 잘 살리 수 있지 않나 싶은데, (그나마 아래 치메르만의 경우 어느 정도 표현 의지를 가지고 연주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은 만족스러운 연주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치메르만 아티큘레이션
지면과 시간의 제약상 악보의 모든 부분을 이렇게 비교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조성진, 임윤찬 등 두 피아니스트의 경우를 보면 위에서 몇 부분을 통해 설명 드린 전반적인 접근 방법과 해석의 경향은 곡 전반에 걸쳐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슈만 특유의 아기자기한 리듬이 매력적인 2악장의 도입부가 (중간에 그윽한 첼로와 함께 하는 이중주를 지나) 악장의 후반부에서 다시 재현될 때도 비슷한 경향이 감지되는데, 섬세한 조성진의 연주와 또 과감하고도 힘이 느껴지는 임윤찬의 연주에서 각기 다른 개성이 느껴집니다.
임윤찬
조성진
그리고 아래 3악장에서 행진곡 풍의 에피소드와 같은 부분도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조성진의 경우 (이 부분에서 임윤찬에 비해 넬손스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좀 더 섬세한 서포트를 받은 것 같습니다만) 시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반면, 임윤찬의 음은 굴곡있고 구조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표현이 아주 신선합니다.
조성진
임윤찬
참고로, 이 곡은 원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으로 작곡된 곡이라 태생적으로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협주곡에 비해 피아니스트가 어떤 오케스트라(지휘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연주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임윤찬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연주이지만 젊은 지휘자와 협연한 위의 부다페스트 실황은 상대적으로 더 생기발랄한 반면, 정명훈 지휘자와 협연한 파리 실황은 (피아노의 음색을 좀 더 두툼하고 따스하게 잡아낸 녹음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부다페스트 실황보다는 좀 더 차분한 분위기입니다.임윤찬 (파리 실황)
이상과 같이 최근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거의 동시에 협연 무대에 올려서 관심을 끈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의 다양한 연주들을 비교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에서 우수한 우리나라의 젊은 연주가들이 이처럼 각자 다른 컬러로 멋진 연주들을 쏟아내고 있어서 이를 서로 비교하며 즐기는 애호가로서는 음악 생활이 예전보다 더 풍요로워진 것 같아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이들이 연주해나갈 다양한 피아노 명작들을 벅찬 가슴으로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