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을 채우는 두 시간의 풍경,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 5시부터 7시까지

여자는 뭔가 모를 복잡한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선다. 크게 동요하지도 않고 애써 담담해 하지도 않는 그녀의 얼굴은 많은 표정을 담고 있고, 그래서 어쩌면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 연구실에 도착한 여자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제자가 찾아와 인사를 하고 고민을 털어 놓고 그녀의 말을 경청한다.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 교수는 자신에게 맡겨진 중책 때문에 힘겨워하고 그녀는 또한 그의 말을 들어 주며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한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아이와 이사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그녀 덕분에 모두들의 마음이 조금씩은 누그러지는 듯하다.남자는 뭔지 모를 고뇌에 차 있다. 연극을 올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배우들의 연기가 어딘가 마뜩찮고 그러다보니 후배들을 다그친다. 선배는 그런 그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공연장의 그는 자신의 얼굴에 감정을 한껏 그려 놓고 있다. '그게 아니야, 이게 아닌데.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뭔가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그걸 고민해 줘. 이건 어때….' 끊임없이 배우들에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그 때문에 모두의 긴장이 증폭하고 공기는 딱딱해진다.
주희. 이미지 제공 : 모쿠슈라
호진. 이미지 제공 : 모쿠슈라
장건재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즉각적으로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누벨바그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그리고 두 시간에 응축된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겠구나, 하는 추측. 장건재 감독은 거기에 한 두 가지를 더한다. 시간에 대한 개념과 안내자에 대한 개념.

#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개념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으로서의 시간 '크로노스'와 상대적이고 포착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인 '카이로스'.

주희와 호진, 우리에게 주어진 두 시간이 영화 속에서도 흐르고 현실에서도 흐른다. 어떤 이에게 그 두 시간은 끝없이 멀어지는 대상과도 같이 느리고 더디게만 느껴지고, 어떤 이에게 그 두 시간은 놓치고 싶지 않은 아쉬움처럼 빠르고 강렬하게 느껴진다. 동일한 개념, 동일한 속력, 동일한 조건을 가진 크로노스이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희의 시간은 타인과의 접점을 친절하고 따스하게 이끌어 간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무언가 자잘한 문제들을 갖고 있고, 주희가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경청과 충분한 온기로 그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해 준다.

호진의 시간은 타인과의 접점을 예리하게 비집는다. 그는 동료들에게 다가가 뾰족한 말과 팽팽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전하려 하기에 충분히 전해질 수 있는 그의 의도는 일면 거북하고 피로도를 높이고야 만다.

영화의 도입부. 주희가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의사의 설명을 듣고 학교 연구실까지 오는 동안 화면을 받쳐주는 곡은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다. 자신의 곡에 독특하고 기묘한 이름을 붙이기로 유명한 사티. 그가 그노시엔느 1번을 작곡할 당시 영지주의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래서 'gnosis'가 제목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고,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 크노소스와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거나 그노시엔느라고 근사하게 발음되는 제목을 가진 이 곡은 악보의 제시어마저 흥미롭다. 보통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 아다지오 식으로 빠르기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제시어를 쓰기 마련이지만 사티의 그노시엔느에는 ‘멀리서부터, 자신의 내면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며, 통찰력으로 스스로를 무장하며’ 와 같은 제시어를 썼다고 한다. ‘그노시엔느’와 딱 어울리지 않는가!

장건재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어딘가 사티의 제시어와 닮아 있다. 초기 유럽 영화가 지향했던 것처럼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완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감독이 스스로의 의도와 의미를 충분히 담아 내놓았지만 거기에 관객 스스로의 해석과 감상이 충분히 더해져서 진정한 하나의 작품이 새로이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영화 <5시부터 7시가지의 주희> 포스터. 이미지 제공 : 모쿠슈라

# 두 개의 시간축

장건재 감독의 이전 작품을 눈여겨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잠 못 드는 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영화 속 주인공은 30대의 주희이기 때문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주인공이 40대의 주희임을 생각하면 두 작품이 어딘가 교차점을 가지거나 연속성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두 영화는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굳이 ‘30대의 주희’와 ‘40대의 주희’를 연결 지을 이유도 없고 '잠 못 드는 밤'과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를 연결해서 볼 이유도 없다.

그러나 두 작품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접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 접점이 단단하고 강한 결합은 또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시간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내 삶의 모습이 누군가의 삶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의 상담자, 조언자가 되기도 하고 나는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듣고 북돋움을 받아 여기까지 살아 온다.

나는 또 다른 우주의 나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우주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 둘은 별개이며 하나이고 클론이나 더미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이미지 제공 : 모쿠슈라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블루', '화이트', '레드'는 각자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각 영화들은 한 장면에서 접점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주인공들의 삶은 독자적으로 펼쳐지지만 그 접점으로 인해 우리는 세 영화를 한꺼번에 떠올리며 세 이야기를 하나의 캔버스에 펼쳐 놓는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서로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생활 반경이 겹치는 누군가들이 반드시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스쳐가지만 (그래서 그들은 나의 삶에 의미가 없지만) 누군가 멀리 떨어져서 나의 일생을 나의 시간을 관찰해 본다면 미미하게나마 접점을 가지게 되는 누군가들이 나의 생각과 인지보다 많아질 터이다.

# 안내자

영화의 후반부, 배달원이 등장한다. 복잡한 복도와 계단으로 이루어진 학교의 내부는 처음 가는 사람에게는 낯선 미로와도 같다. 스튜디오를 찾아가야 하는 배달원은 주희에게 길을 묻는다. '음, 좀 복잡한데…'라고 말하면서도 주희는 가장 단순하고 쉽게 설명해준다. 누구라고 주희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가면 쉽게 스튜디오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을 때면 금방 쉽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발을 떼어 보면 설명을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고 발걸음은 이리저리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종종거리게 된다는 것을.

길을 아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상세하고 세밀한 설명이라 해도 그대로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지도가 필요하고 지도를 읽는 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 게다) 공간적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위치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금 더 앞서 살아 본 사람들은 경험치라는 것이 있어서 특정한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방법이 조금은 더 나은지를 알고 있고 그 방법을 후대들에게 알려주려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 올 시공간적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충고와 안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것이다. (이 장면의 해석은 관람자로서의 본인의 해석입니다. 감독의 의도는 다른 것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하게 읽어내는 장면이라고 하네요)

신지혜 (작가·칼럼니스트·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