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의 자그만 아트페어가 파리 '라거펠트 저택' 접수한 비결은 [마이애미 아트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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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 참여하는 대형 아트페어 대신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된 아트바젤이 미국 마이애미에 상륙한 건 2002년이었다. 설립 30여년 만에 첫 '외출'이었다. 아트바젤을 맞이한 마이애미의 디자이너, 기업가, 갤러리, 브랜드 전문가와 수집가들은 3년을 고민했다.
30~60개 갤러리만으로 '부티크 아트페어'
마이애미에서 시작해 바젤과 파리로 수출
아트바젤과 파트너십 맺고 코앞에서 공동 개최
"앉아보고 누워보세요" 관람객 친화적 아트페어
자산가들 넘어 패션 브랜드와 기업까지 고객으로
개성 넘치는 부스마다 '인증샷' 찍고 매출도 불티
"판박이 같은 아트페어는 지겹지 않아? 마이애미로 사람들을 오게 하려면 뭘 해야 하지?"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게 바로 '디자인 마이애미'다. 아트바젤 마이애미와 같은 시기에 열리는 부티크 아트페어다. 천편일률적인 하얀색 부스를 구획별로 나누고, 그 안에 그림을 걸거나 설치 작품으로 채우는 게 기존 아트페어의 방식이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참여하는 갤러리 수를 30~60곳 정도로 줄이는 대신 '누구나 꿈꾸는, 거실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다. 이미 알려진 거장 디자이너의 최고급 가구들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들을 세계 각국에서 끌어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렇게 개성 넘치는 부스와 작품으로 꾸민 덕분에 디자인 마이애미는 어디에서 찍어도 '인생샷'이 나오는 명소가 됐다.
또 한가지. 기존 아트페어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디자인 마이애미에선 허용된다. "그림이나 조각을 만지지 마세요"가 아니라, "의자나 소파에 앉아보고 장식장 문도 열어보세요"라고 말한다. 예술적인 디자인이 적용됐지만 누군가가 사용해야만 그 쓰임이 생기는 작품들의 성격을 적극 수용한 것. 장벽이 낮아진 만큼 사람들은 더 활기차게 앉거나 누워서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부스 곳곳엔 작가들이 직접 나와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관람객과 소통했다. 디자인 마이애미를 만든 건 마이애미의 럭셔리 지구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기획한 기업인이자 수집가인 크레이그 로빈스. 2015년 제니퍼 로버츠 최고경영자(CEO)에게 경영을 맡기고 지금은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아트페어 수요층을 대폭 넓혔다. 미술관과 박물관, 돈 많은 컬렉터들이 기존 아트페어의 소비자였다면, 디자인 마이애미에는 예술인과의 협업을 원하는 패션 브랜드와 하이엔드 레스토랑 브랜드까지 찾아온다. 작가와 갤러리들도 괜찮은 협업 파트너들이 제발로 찾아오니 이 페어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아트바젤은 디자인 마이애미에 러브콜을 보냈다. "아트바젤의 세계 박람회를 같이 하자"고. 디자인 마이애미와 공동 개최에 관한 파트너십을 맺은 아트바젤은 홍콩(3월), 바젤(6월), 파리(9월), 마이애미(12월) 등 연간 네 차례 각 대륙에서 열리는데, 이 중 홍콩을 제외한 곳의 행사를 아트바젤과 디자인 마이애미가 가까운 장소에서 함께 열린다.○파리의 칼 라거펠트 저택도 접수
디자인 마이애미의 힘은 지난 10월 '파리+파 아트바젤'에서 다시 한번 입증됐다. 몇 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디자인 마이애미 파리'라는 이름으로 패션과 문화의 본고장에 입성했는데, 이게 '대박'을 친 것.
이들의 첫 파리 페어 장소는 파리 근교 생제르맹데프레 지역의 18세기 저택이자 '샤넬'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저택이었던 메종 호텔(L'hôtel de Maisons)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디자인 마이애미가 의심 많고 까다로운 유럽의 컬렉터들에게 '엄지 척(Two thumbs up)'을 받았다"며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작가와 장인들을 만날 수 있는 신선한 실험이었다"고 했다.파리의 상징과 같은 이곳의 정원과 안뜰, 내부 공간에 '공존'을 주제로 현대적인 감각을 입힌 가구들을 큐레이션했다. 16개의 파리 갤러리, 11개의 해외 갤러리가 참여해 파리의 패션계는 물론 미술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건물 외벽에 대형 가구 조각을 전시하는가 하면, 프랑스 장인과 미국 목공예가(댄 폴록)의 협업 작품을 전시하는 등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을 연결하는 작업들로 주목 받았다. 크레이그 로빈스 디자인마이애미 창립자는 "파리로의 진출은 오랜 꿈이었고,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아트페어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고 했다. ○모든 대륙 장인들의 12월 축제
파리의 열기는 지난 5~10일 고향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로 이어졌다. 행사장은 오래된 가구와 조명, 호텔 브랜드 등과의 협업 작품 등 40개가 넘는 갤러리 부스와 20개 이상의 브랜드 협업 작품으로 가득찼다. 5000만원~1억원 사이의 작품들이 주를 이뤘고, 얀 쿠르베, 구마 겐고 등 장인의 작품부터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대륙의 신진 작가 작품들까지 다양했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아트바젤 행사장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자리잡았는데, 야외 정원과 VIP라운지는 밤이건 낮이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람객 수는 5일간 4만5000명으로 아트바젤(7만9000명)보다 적지만, 참여 갤러리의 수가 6분의 1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알짜'다. 주최 측은 올해 '파리 진출의 효과'로 역대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테마 큐레이션은 디자인 마이애미를 다른 아트페어와 차별화시키는 핵심 포인트다. 관람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게 이 섹션을 만든 취지다. 올해의 주제는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곳(Where We Stand)'였다.화려하고 위트 넘치는 모던 디자인 사이에 러시아와 전쟁중인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 분쟁지역에서 탈출한 작가 등이 저마다의 고민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했다. 아나 카닉 디자인마이애미 수석 큐레이터는 "세계는 너무 자주 분열된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며 "디자인을 통해 우리를 연결하고, 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이라이트는 존 레논과 요코 오노의 침대에 경의를 표하는 '존과 요코'라는 이름의 의자. 사자와 비둘기로 표현해 주목 받았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루카스 바그웨스는 파스텔색으로 물들인 나무 지붕널을 겹겹이 쌓은 작품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런던에 본사를 둔 럭셔리 리조트 아만의 인테리어 부문은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만든 테이블과 의자 등 가구 컬렉션을 새로 공개했다. 아우디, 펜디, 파네라이, 보테가베네타, 페리에주에, 버켄스탁, 쾰러 등의 브랜드가 올해 후원사로 참여해 부스를 만들거나 관람객들을 위한 행사를 열었다.
마이애미=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