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복잡한 곡들을 섬세하고 우아하게 펼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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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라흐마니노프 전곡 연주 첫 날(13일)
협주곡 1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협주곡 2번 등 3곡 연주
KBS교향악단과 협연
루간스키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이번 내한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두 차례(13·15일)에 걸쳐 라흐마니노프 전곡(총 5곡)을 연주한다. 첫 연주였던 지난 13일 루간스키와 KBS교향악단은 80여분간 협주곡 1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협주곡 2번을 들려줬다. 라흐마니노프 한 곡도 연주자에게 버거운데 세 곡이라니. 대부분의 릴레이 연주와 마찬가지로 완주에 목표를 둔 지구력 테스트가 될까. 그러나 루간스키에게는 전혀 테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3곡 모두 음악적·체력적으로 모두 완벽한 연주를 선보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 복잡하고 거대한 곡을 단순하게, 그리고 귀족처럼 우아하게 소화해냈다. 적어도 라흐마니노프에 있어서는 최고의 하드웨어를 보유한 인물이라는 걸 보여준 셈이었다.
첫 곡은 공연장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협주곡 1번. 시작하자마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모두 터져나오는 곡이지만, 의외로 강렬하지는 않았다. 체력 분배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곧 그의 스타일임을 알게됐다. 그는 짱짱한 하드웨어를 토대로 절제되고, 질서정연한 라흐마니노프를 지향하는 듯 했다. 최은규 음악평론가는 이러한 그의 연주를 두고 ‘지적인 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화음이 이어지다가, 카덴차(협연자의 솔로 부분)로 진입하는 구간에서는 그 수많은 음이 저마다 있어야할 곳에, 나와야 할 타이밍에 딱딱맞게 등장하며 감탄을 자아냈다.
이어 연주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그의 절제미가 더욱 돋보였다. 이 곡은 하나의 테마로 24개의 변주가 등장하는데, 그는 어떤 까다로운 부분이 등장해도 매끄럽고 유려하게 이어갔다. 그에 맞춰 악단도 보폭을 맞추며 긴장감을 더했다. 하이라이트는 2부의 협주곡 2번. 2번은 귀에 꽂히는 멜로디와 화려한 화음들의 향연으로 대중성이 높은 곡이다. 그가 첫 화음을 누르자마자 앞의 1부동안 에너지를 비축해왔음을 체감했다. 지치기는커녕 이제야 제대로 시작한다는 듯. 첫 도입에 등장하는 총 8번의 화음에서 그는 활화산처럼 응축된 에너지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1악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유명한 클라이맥스 파트에서 그는 거의 손과 팔을 수직으로 낙하하며 화음을 연신 내리쳤다. 그런데도 음이 거칠거나 미스가 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얼마 전 내한한 예핌 브론프만처럼 소리통이 아주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곡의 레이어를 촘촘히 표현해 풍성한 사운드를 연출했다. 다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앙상블이 미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듯 다소 둔하게 들리는 점은 아쉬웠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광활하면서도, 황홀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2악장. 루간스키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여러번 반복되는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했다. 자칫 감정과잉으로 흐를 수 있었지만, 루바토(템포를 자유롭게 연주)를 절제있게 사용해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없이 우아했다. 초반부터 글리산도 화음으로 펼쳐지는 3악장은 흔들리기가 쉬운 부분이었다. 체력은 체력대로 바닥났는데, 속도도 가장 빠르고 음도 제일 많기 때문. 루간스키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쌩쌩했다.
간혹 오케스트라가 루간스키의 속주에 종종 버거워 보이는 구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협연자의 존재감이 워낙 중요한 작품이었던 만큼 약간의 옥에 티는 인간미로 보였다. 그만큼 이들은 세 곡의 협주곡을 고품질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앙코르에서는 약간은 흥분할 법도 하건만, 루간스키는 프렐류드 12번까지 서늘함을 유지했다. 매끄럽게 돌아가는 손가락, 반짝거리는 멜로디로 여운을 남겼다.
올해는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곳곳에서 하듯 라흐마니노프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150번째 생일 파티의 대미를 루간스키가 장식했다는 점은 관객들에게나 라흐마니노프에게 큰 행운임이 틀림없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