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은 바로 '칙칙한 흑갈색'이라는데

[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
사라 칼다스
“의상디자인 학과인가요?”

나도 모르는 새 다양한 패션 실험을 감행하던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말이다. 흰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재질이 얇고 홀로그램처럼 반짝임이 있었다. 사탕껍질 같다고나 할까. 고등학교 때 교복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유일했을 숏컷 헤어스타일을 고수해야 했던 우리 여고 친구들은 한동안 나처럼 반작용의 시기를 거쳤다. 내가 저 말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 인생에서 딱 한번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도 아니면서 회색, 베이지, 검정색 인생이었다. 조금 다르게 입자면 갈색이다. 어느 날 우리 팀 옷걸이에 걸린 코트가 모두 갈색이라 누가 바꿔 입고 나가도 몰랐던 날도 있다. 단순한 옷은 고민과 번거로움을 줄이고 오직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하는 효과가 있다곤 하던데. 화성 정착을 꿈꾸는 일론 머스크라면 정말 맞는 말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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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주는 영감과 감정

색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밋밋해 보이는 베이지한테도 <컬러의 말> 저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베이지는 부르주아의 핵심 색깔이 될 수 있다. 평범하고 독실한 척하며 물질적이다.” 각각의 색은 조합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강렬한 사람 둘을 붙이면 에너지가 폭발한다고 말한 것처럼(이십 대 베컴과 빅토리아를 보고), 색과 색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케미스트리가 만들어진다. 색의 조합을 다룬 <완전한 배색>에서 ‘음전하고 지루한’ 베이지는 덧대어지는 색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증폭기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
<완전한 배색>을 읽은 다음 날이었다. 평범한 아침의 여느 출근길이었지만, 나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경험했다. 옅게 깔린 은회색 구름 사이로 드러난 하늘색 한 조각, 그 테두리에서 쏟아져 내리는 선명한 빛줄기는 고양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립적이며 편안한 느낌의 회색에 좀더 다채로운 느낌을 주고 싶을 때는 스카이블루가 제격이다. - <완벽한 배색> 중에서 색의 이름을 몇 개 더 알고, 배색의 조합을 주의 깊게 외워서 어딘가에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책의 아무데나 펼치면 쏟아지는 다채로운 색의 조합이 오늘 나의 감정과 관찰의 범위를 한 뼘 넓힌다. 그렇게 다양한 색을 바라보다 보면 긍정적인 감정들이 살아난다. 삶의 매 순간마다 생산성을 외치며 무채색 옷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내 손가락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심술궂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바바 할머니가 끼었을 법한 초록색 알반지가 끼어 있다.
영화 &lt;센과 치히로&gt;의 유바바

혐오하든 사랑 받든 조합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가장 혐오스러운 색은 어쩌란 말인가. 호주 정부가 실행한 실험은 괴팍하게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을 찾아냈다. 바로 칙칙한 흑갈색(Pantone 448c)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선호할 만한 색은? “본연의 광휘와 풍부함 덕분에 모든 노랑 계열 중에 가장 사랑 받고 모든 오렌지 계열 중에 가장 큰 인상을 심어주며, 모든 갈색 계열 중에 가장 높은 찬사를 받는다”는 금색이다. 그런데 색도 사람과 비슷한가 보다. 똑같은 사람들만 한가득한 세상이 있을 턱도 없지만 그런 이들만 모인 곳은 고인 물이 되어 썩고 만다. 금색이 너무 지나치면 천박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사람들이 꺼리는 팬톤 448c도 쓰이기 나름이다. 담뱃갑에 사용되어 소비를 억누르는 목적을 다했다.

색채 이론가 줄리엣 도허티는 <완전한 배색>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드리 햅번이 팬톤 448c 컬러의 벨벳 코트를 입고 다홍색 스카프로 멋지게 마무리한 모습을 생각해보자. 갑자기 이 색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두 색이 훌륭한 배색을 이룬 것이다. (...) 어둡고 우중충한 하늘일수록 무지갯빛이 더 밝게 보이는 법이다.” 마치 각기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에 사라져야 할 색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를 전한다. 세상 최고의 색은 모든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