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손실 수백억 돌려막기"…증권사들 '짬짜미' 대거 발각

금감원, 채권형 랩신탁 '짬짜미 돌려막기' 대거 발각
9개사 검사 결과 9곳 모두 적발…'업계 만연'
증권사별로 수백억~5000억원 채권 평가 손실을 고객간 전가
금융감독원이 단기채권 판매 수단인 채권형 랩어카운트(랩)와 신탁을 통해 증권사들이 서로 짜고 채권 ‘돌려막기’를 한 사례를 대거 적발했다. 그간 증권업계서 대형 법인 고객의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이뤄진 자전거래, 파킹거래 등을 두고 금융감독당국이 업계 전반에 칼을 빼든 첫 사례다.

금감원 “검사 대상 9개사서 모두 적발…불법행위 만연”

금융감독원은 9개 증권사에 대해 채권형 랩·신탁 업무실태 관련 집중점검을 실시한 결과 증권사들이 안팎으로 채권 돌려막기 거래를 벌인 등 각종 위법 사실과 내부통제 미비 사례를 발각했다고 17일 밝혔다. 금감원 관계자는 “9개 증권사를 점검했는데 9곳 모두에서 각종 문제점이 발각됐다”며 “그만큼 불법행위가 업권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랩과 신탁은 증권사가 투자자와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상품이다. 여러 투자자의 돈을 모아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위탁자 전용으로 단독 운용한다. 투자 목적과 자금 수요에 맞게 운용할 수 있어 기업 법인 등이 선호한다.

증권사들은 2010년께부터 기업·기관 등 대형 법인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채권형 랩·신탁 상품을 활용했다. 시중금리에 비해 1%포인트가량 금리를 더 제공하는 단기 채권형 상품을 원금보장 상품처럼 판매했다.

기관 등이 단기 자금을 맡아달라며 만기를 짧게 잡은 랩·신탁 계좌에도 유동성이 낮은 고금리 장기 채권이나 기업어음(CP)를 편입해 운용했다. 3개월 만기 계좌에 10년 만기 회사채를 넣는 식이다. 높은 수익률을 내세워 법인 투자금을 끌어오기 위해서였다. 기업이 돈을 찾아갈 때 보유 채권을 매도하는 대신 신규 고객의 자금을 기존 고객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만기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방식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작년 말이다. 자금시장에서 금리가 급등하자 채권형 랩·신탁에서 많게는 수조원의 평가손실이 발생했다. 막대한 손실이 난 상태로 투자금을 돌려줄 수 없었던 증권사들이 회사 고유자산 등으로 기업 고객의 수익률을 보전해줬다는 의혹이 이때 속속 제기됐다.

금감원은 지난 5월부터 하나증권과 KB증권을 시작으로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키움증권, 교보증권, 유진투자증권, SK증권 등 9개사에 대한 랩·신탁 상품 불건전 영업관행 집중 점검을 실시해왔다. 금감원은 “수탁 잔고의 규모와 증감 추이, 시장정보 등을 고려해 점검 대상 증권사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5000억원대 ‘돌려막기’ 사례도 적발

금감원은 이번 집중검사에서 점검 대상 증권사들이 불법 자전거래를 통해 투자자 계좌 손실을 다른 투자자 계좌로 전가한 사실을 여럿 발견했다. 한 증권사가 만기가 도래한 고객의 기업어음(CP) 등 투자 자산을 다른 증권사로 하여금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사게 하고, 대신 만기가 남은 다른 고객의 계좌를 통해 상대 증권사의 다른 CP를 비싸게 사주는 식이다. 이같은 방식을 통하면 당장 만기가 도래한 투자자는 손실을 보지 않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만기가 남은 투자자 계좌에 평가손실이 발생하지만 증권사들이 이 투자자에 대해서도 향후 '돌려막기'를 할 수 있는 구조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마다 이같은 손실전가금액이 최소 수백억원 규모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증권사는 고객간 손실전가 금액 규모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증권사는 작년 7월 이후 다른 증권사와 6000여회 연계·교체거래를 통해 총 5000억원 규모 손실을 돌려막기했다.

자사 펀드·신탁 활용…고객 손실자산 비싸게 사주기도

증권사들이 법인 고객의 목표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 자기 자본까지 동원한 사례도 발각됐다. B증권사는 작년 11~12월 다른 증권사에 가입한 신탁계좌를 통해 자사 고객 랩·신탁의 CP 등을 고가 매수했다. 이같은 방식을 통해 고객이 본 이익 규모는 총 1100억원에 달한다. C증권사는 자사에 설정한 펀드를 활용해 작년 11월부터 지난 5월까지 고객 랩·신탁을 고가에 사들여 700억원 규모 이익을 제공했다.

D증권사가 G증권사에 자기 고유자금으로 펀드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자사 고객의 특정 채권과 CP를 고가 매수하도록 요청한 사례도 있었다.

일부 증권사는 같은 투자자에 대해서도 계좌간 자전거래를 벌였다. 한 고객의 1번 랩계좌가 보유한 CP를 2번 랩계좌에 시가보다 비싸게 매도하고, 이를 통해 1번 랩계좌의 목표수익률을 달성한 식이다.

금감원은 또 일부 증권사들이 기관·기업의 수익률을 위해 계약을 위반해가면서까지 랩·신탁을 운용한 일도 적발했다. 계약시 약정한 운용 자산의 만기 한도와 신용등급 기준 등을 지키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얘기다.

금감원 "잘못된 관행 근절해야"

증권업계는 이같은 거래 방식에 대해 '그간 관행이었다'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면 금융감독당국은 강경한 입장이다. 원칙적으로 금지된 거래인만큼 이번 검사를 계기로 정상화 고삐를 죌 것이란 방침이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와 각사 운용역 등에 대해 법적 조치에 나설 전망이다. 각사에서 손익전가 거래를 도맡은 운용역 30여명에 대해선 주요 혐의사실을 수사당국에 넘길 방침이다.

금감원은 "그간 판례 등을 볼 때 비정상적인 가격으로 거래해 고객에게 손해를 전가한 행위는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중대 위법행위"라며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선 금융투자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적법한 손해배상 등을 거쳐 환매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금감원은 이어 "랩 ·신탁을 확정금리형 상품처럼 판매·운용하고 환매시 원금과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라며 "이를 근절하려는 증권업계의 개선 노력과 투자자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