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82세 ‘폐품 미술’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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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임충섭 개인전 '획'미술관 벽에 쓰레기들이 걸렸다.
2024년 1월 24일까지
누군가 버렸는지 모를 자전거 안장, 난초 그리는 법을 중국어로 설명한 책까지…. 벽에 걸린 오브제들은 작가 임충섭(82)이 실제 길거리를 걷다 주워 온 쓰레기들을 모아 만든 작품 ‘발견된 오브제’다. 한 층 아래에는 이 쓰레기들을 조합해 박스 안에 넣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연작들이 관객을 맞는다. ‘화석-풍경@다이얼로그’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은 그가 뉴욕 거리에서 발견한 못, 지퍼, 전구, 휴지조각을 박스 안에 넣고 마치 연극무대처럼 새로운 세계를 꾸며낸 작업이다.
임충섭은 이렇게 폐품을 모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아상블라주’ 작업의 대가로 불린다. 그의 ‘길바닥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개인전 ‘획’이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지난 2017년과 2021년에 이어 준비한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그가 독창적 조형을 구축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2003년 사이의 작품들 40점을 다룬다. 그가 태어난 한국과 작품세계를 펼친 미국, 자연 그리고 문명 등 서로 다른 ‘양자’ 사이의 다리를 놓는 작품들이 주로 나왔다. 임 작가는 직접 현장에 나와 기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임충섭이 이런 ‘쓰레기 예술’로 불리는 작업에 몰두한 이유엔 ‘모든 물건 안에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바탕이 됐다. 그는 역사가 담긴 물건들을 모아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는 작업과정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날도 그는 오브제 연작 앞에서 “길바닥에서 나와 맘이 통하는 모든 것들을 주워와 모은 작품이다”라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 속에도 조형적 미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이야기를 했다.임충섭은 아상블라주뿐만 아니라 드로잉부터 설치미술, 사진, 키네틱, 음향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예술세계를 펼쳐 온 작가다. 작품에 쓰이는 재료도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다. 1층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 ‘흙’에는 작품 제목 그대로 맨하탄에서 살던 시절 가져온 흙을 그대로 사용했다. 모래로는 자연을, 나무 조형물로는 현대 건축물로 대표되는 도시 문명을 상징했다. 자연과 문명 ‘양자’ 사이의 인간을 표현했다.이번 전시에서 갤러리현대는 임충섭의 작품 하나만을 위해 2층 전시장 한 구석을 내줬다. 그의 키네틱 설치작업 ‘길쌈’이 그것이다. 대형 작품에서는 바닥에서 올라오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실과 나무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서로 마주보며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는 씨실과 날실이 한 올씩 엮여 직물을 만들어내는 한국 전통 ‘베틀’의 구조와 닮았다.그리고 작품이 놓인 바닥에는 영상이 계속 흘러간다. 영상 속에는 작가가 하와이 여행 중 직접 찍은 밝은 달 영상이 담겼다. 그는 길쌈을 통해 전통 건축과 서양의 영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시켜 관중에게 동양과 서양 사이의 조화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는 세종대왕과 한글을 상징하는 작품도 나왔다. 임충섭은 “몬드리안의 ‘기하학 콘셉트’를 600년 전 한글이 이미 가졌다고 생각했다”며 “대한민국 민족이 가진 뛰어난 예술적 영감을 작품으로 녹여냈다”고 말했다. 그는 한글의 24개 자음과 모음을 캔버스 위에 흩뜨렸다.
캔버스 형태도 독특하다. 네모 반듯한 캔버스를 직접 늘리고 깎아 둥그런 타원 형태로 만들었다. 바로 옆에는 한문을 가지고 만든 작품을 나란히 배치했다. 한글이 가진 조형적인 부드러움과 중국의 수직, 수평적인 언어요소를 대비시키기 위한 그의 의도가 담겼다.화가로서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자 임충섭은 “과학과 반대되는 인생”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것에도 정답이 없어 재미있고 매력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이론으로는 절대 표현될 수 없고, 거짓말도 섞인 것이 내가 하는 예술의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매력있는 거짓말’은 2024년 1월 24일까지 전시된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