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59점 그림이 모여 만들어낸 습지 풍경

국제갤러리 이광호 개인전
'Blow-up'(확대)
1월 28일까지
작품 앞에 선 이광호 작가.
그림은 아무리 현실 같아도 그림일 뿐이다. 화가가 만들어낸 그림 속 세상은 테두리라는 벽을 넘어설 수 없다.

사실주의 중견 작가인 이광호(이화여대 교수)는 그 벽을 허물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60점의 그림을 가로 12m가 넘는 거대한 벽면에 퍼즐처럼 이어붙여 습지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작업을 마치고는 맨위쪽 가장자리에 있는 그림 딱 한 점을 떼냈다.“관람객들은 그림을 떼낸 빈자리를 바라보며 원래 있었을 풍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림에 그려진 장면 밖의 세계, 습지 근처의 자연 풍경까지 상상하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그림의 범위를 테두리 너머로 확장하고 싶었습니다.”

떼어낸 그림의 모습을 궁금해할 관객들을 위해, 해당 그림은 좀 더 크게 다시 그린 뒤 맞은편 벽에 걸어뒀다.
오른쪽 위 '퍼즐 한 조각'이 빠져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광호의 개인전은 이렇게 ‘그림의 본질’이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장르도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구상화인지 추상화인지가 결정돼서다. 벽면 풍경을 구성하는 59개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구상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추상화다.이 작가는 “뉴질랜드의 케플러 트랙이라는 습지에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그렸는데, 실제 습지는 그림보다 훨씬 더 작다”며 “실제 풍경을 그렸지만 비현실적으로 크게 확대했다는 점에서 추상화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전시 제목이 ‘Blow-up’(확대)인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깊은 뜻을 담은 작품인데도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의미를 몰라도 누구나 보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려서다. 붓질과 색, 질감이 캔버스마다 미묘하게 다른 점이 ‘보는 맛’을 더한다.

“캔버스의 질감은 음식의 육수와도 같아요.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림 전체의 느낌을 좌우하지요. 캔버스 천의 굵기나 연마도를 달리 해서 물감의 흡수 정도와 붓질의 호흡을 달리 했습니다.” 고무붓으로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 물감에 밀랍을 섞은 뒤 열을 가해 캔버스에 붙이듯 칠하는 엔코스틱 기법 등 사용한 기법도 다양하다.
'Untitled 4819-6'. 따로 떼어낸 그림은 마치 추상화 같다. 국제갤러리 제공
‘교수 겸 화가’답게 그의 말솜씨는 유려하고 작품 설명은 친절했다. 적잖은 화가들이 “나는 언어 대신 그림으로 말한다”며 상세한 설명을 꺼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회화에는 매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화가만의 고유한 개성과 특징, 가수로 따지면 음색이고 소설가로 따지면 문체와 비슷한 개념이지요. 저만의 매너와 붓질을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결과물입니다.” 전시는 내년 1월 2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