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그림 편지 재미에 빠지면 SNS는 별생각도 안 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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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가미 작가 후쿠마 에리코 인터뷰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일상이 된 시대다. 빨간 우체통은 자취를 감추고 있고, 정성들여 눌러 쓴 편지도 서서히 옛 추억으로 잊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먹과 붓을 사용한 손 편지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27년 차 에테가미 작가인 후쿠마 에리코(62·사진)씨다. 에테가미(繪手紙)는 일본어로 그림을 뜻하는 '에'와 손 편지를 뜻하는 '테가미'의 합성어로, 직접 그린 그림에 짧은 시구를 더한 엽서다.
"정성 들인 손 편지만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
한국서 펼친 에테가미 보급운동
꼭두각시 등 한국 전통문화 접목해
최근 에세이집 <에테가미>를 펴낸 후쿠마씨와 20일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만났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느릿한 손 편지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속도와 활자 정보에 피로해진 몸과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원하고 있지 않을까요. SNS 메시지는 기억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정성 들인 손 그림 편지는 쉽게 잊히지 않아요." 후쿠마씨는 1961년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 한국과의 인연은 1994년 재일교포 출신인 남편 양용웅 전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장을 만나며 시작됐다. 2017년 남편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뒤 전국 40여개 학교에서 강좌를 열고,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에테가미 보급운동을 펼쳤다. 양 회장은 1982년 신한은행 창업 당시 재일교포들을 결집해 투자 자본을 마련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2001년 신한금융지주회사가 설립된 뒤 사외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장르지만, 일본에서 에테가미는 일찍부터 전통적인 서화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무더위에 그림 편지로 안부를 묻는 '쇼추미마이' 풍습이 대표적이다. 1979년 서화가 고이케 구니오(1941~2023)가 한 잡지에 6만장의 에테가미를 발표하며 유행이 재점화됐다. 현재 일본 내 에테가미 인구는 200만명에 이른다.후쿠마씨가 에테가미를 접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작은 한국 진출을 앞둔 남편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에 있는 남편 지인들께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언어와 문화적 장벽이 고민이었다"며 "꽃과 과일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린 뒤, 어설픈 한글로 '감사합니다'라는 글씨를 눌러 적었다"고 회상했다.후쿠마씨는 1996년부터 고이케 작가 문하에서 에테가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고이케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난 8월까지 '나팔꽃' '램프' 등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승이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그림 없이 글만 적혀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에테가미를 널리 알려주는 것이 나의 행복과 꿈이다. 나도 마지막까지 힘을 보태겠다.'
"고이케 선생님은 오랜 암 투병으로 기력이 다한 순간까지도 손 편지를 쓰셨어요. 힘없어 삐뚤빼뚤 적힌 글자였지만, 선생님의 진심은 저한테 그대로 전해졌죠." 후쿠마씨 작품의 특징은 에테가미에 한국적인 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목인 1·2'가 대표적이다. 한국 전통 장례문화인 상여의 장식으로 쓰였던 꼭두각시 인형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다. 그는 "정적인 일본 인형들보다 역동적이고 해학적인 표정을 지닌 한국 꼭두각시 인형들에 매료됐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이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혔을 때는 일본의 가족과 한참을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때마다 가족의 마음을 확인하게 해준 것은 에테가미였다. 후쿠마씨는 1년간 매일 고향의 부친과 손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던 기록을 모아 2020년 <88세의 손그림편지 365일>을 펴냈다. 후쿠마씨의 부친은 91세인 지금도 딸과 증손자녀한테 에테가미를 전하고 있다고 한다.
에테가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진심'을 꼽았다. 편지를 받는 사람을 향한 정성 어린 마음만 있다면, 그림이나 서예 실력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아마추어'인 작가의 손자녀들과 주고받은 에테가미를 최고로 꼽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에테가미는 작품성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교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그림이 난잡해지고, 오히려 진심이 가려질 수 있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연말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한 에테가미 작성법을 청했다. "붓을 수직으로 들고, 힘을 뺀 채로 하고 싶은 말을 진솔하게 적어보세요. 오는 2024년이 용의 해니까, 그림은 용이 어떨까요?"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