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이 살아있는 이유를 증명한 전시… 파리 ‘누아&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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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미래의 파리통신전시장에 들어서자 세상의 소음이 한 층 가라앉은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현란한 모든 색이 제거되고, 공간에는 흑(黑) 과 백(白) 두 가지의 색감만이 떠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 Noir & Blanc 전
벽의 빈 공간 사이로 보이는 다음 전시 공간은, 마치 여러 개의 액자가 나열되어 있는 것 같다. 벽, 텍스트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무채색인 공간 위에 또 다른 무채색의 사진들이 놓여있다. 뤼미에르형제에 의해 개발된 초기 컬러사진은 1907년부터 상업화되어 현재 대중에게 가장 보편적인 사진 종류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예술사진의 경우, 흑백사진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며 높은 비율을 점유하고 있다. 특정 목적을 위해 흑백이 사용되고 대부분 컬러로 제작되는 현재의 영상 분야와 달리, 흑백 사진은 전시회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 기술 발달과 현재의 경향 흐름 속에서 흑백사진은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
흑백사진을 칭할 때 자주 쓰이는 모노톤 (Monotone), 모노크롬 (Monochrome)은 하나의 색감 만이 부각된 단색, 단색 화법을 의미하며, 사진에서는 빛의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에 따른 흰색, 검은색, 회색, 세피아톤을 말한다.
색채를 의식적으로 제거한 흑백사진은, 다른 효과와 목적을 의도한다. 많은 사진가들은 깊이 있는 사진 표현을 위해 흑백사진을 선호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사물을 지각하는 데 있어 색정보는 외형적 형태 인지에 영향을 주며, 반대로 채도를 낮추게 되면 정보의 결핍을 채우려 더욱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물을 촬영한 컬러 사진과 흑백사진을 비교하였을 때, 흑백사진에서 두 사물이 거리감을 더 깊게 느끼는 것으로 밝혀졌다. 컬러가 주는 불필요한 시각적 자극을 탈피함으로써 감상의 깊은 몰입감을 유도하고, 한 가지로 통일된 색감에서 시각적 정서적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색감의 단조로움은 작품의 자체에 더욱 집중하게 하며, 흑과 백의 미세한 명도 대비에 따른 밝기, 그라데이션, 질감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더욱 명확히 다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과 특색들로 흑백사진은 오늘날까지 사진 표현의 중요한 한 방식으로서 자리 잡았으며, 사진가들은 컬러와 흑백의 표현 효과를 비교하여 작업에 걸맞은 방식을 선택한다.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은 ‘사진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개의 사진 전시를 개최한다. ‘누아&블랑(Noir & Blanc)’ 전에서는 36개국 총206명의 사진작가들의 흑백 사진을 한데 모았다. 전시는 연대기적 제약에서 벗어나, 표현 방식의 차이에 따라 총 9개의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180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가 흔히 흑백사진 하면 떠올리는 소피아톤의 사진들이 일반적이었다. 갈색 혹은 초록색이 섞인 흑백 이미지로 종이에 주로 인쇄되었고, 종이에 성질에 따라서도 색상을 달리했다. 그러다 19세기 말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금의 사진 종이 바리타지(紙)(Baryta paper)가 개발되면서 흑백의 대비가 선명한 사진이 등장하였고, 이후 이 색상이 흑백사진의 대표적 색감으로 자리 잡았다.
첫 번째 전시장 코너를 돌자마자 흑인 여성 3명과 눈이 마주친다. 마치 흉상처럼 상반신만이 드러난 초상화는 인물 피부의 검은색과 흰색 옷, 배경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프랑스 사진가 발레리 블랭(Valérie Belin)은 다양한 흑백 색감 범위를 사용하지만, 회색의 중간 톤을 배제함으로써 촬영 대상의 조형적 형태를 강조한다. 작가는 ‘신체 오브젝트’를 기획하면서 다양한 인물의 정체성을 형태를 통해 탐구하였다. ‘보디빌더’ 시리즈에서는 자신의 몸 형태를 완벽히 변화시켜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했다. 또한, ‘모로코 신부’ 시리즈에서는 신부의 얼굴보다 부피가 큰 화려하고 장식적인 드레스의 패턴을 강조해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 볼 수 있는 ‘흑인 여성’ 시리즈는 샤틀레 레 알 역(Châtelet-les-Halles) RER 전철 환승 통로에서 만난 세네갈 여성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발레리는 사람의 신체 중 정체성의 특이점을 담고 있는 부분이 얼굴이라 생각하였고, 세네갈 여성들의 얼굴에서 특히 조각(조형) 적인 특징이 강조된다고 느꼈다. 세네갈 사람들의 납작한 얼굴, 매우 하얀 눈, 어두운 피부,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과장하여 마치 하나의 조각, 오브제처럼 표현했다. 작가는 검정과 흰색의 극적인 대칭으로써 아프리카 예술에 대한 서구적 관점을 깨뜨리고, 젊은 여성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하얀 페이지(Page blanche)’라는 카테고리에 다다르게 된다. 풍경화 작품으로 보이는 사진들은, 멀리서는 회화인지 사진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흑백사진은 현실의 색상이 모두 반전되었다는 특징에서 이미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보는 컬러풀한 세계와는 차별화된 다른 시각으로 직면한 세계인 것이다. 미국 흑백 풍경 사진가 앤슬 애덤스(Ansel Adams)의 ‘롱 파인 피크(Lone pine peak)’는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 설산을 촬영한 작품이다.작가는 과도한 밝기와 과다 노출을 설정하여 세부적인 풍경과 눈의 거칠기를 지워 나갔다. 흰색과 검은색의 패턴 조합은 설산의 긴 능선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미세한 나무들의 그림자는 웅장한 산의 볼륨감을 만들어 내고, 흰색과 검정의 가르는 빛의 차이는 마치 추상화의 붓 터치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빛의 정도, 톤을 컨트롤하여 사진의 현실적 특징을 지양하고 추상성을 부여했다. 사진 역사상 기념비 적인 작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생 라자르 역 뒤에서(Derrière la gare St Lazare, place de l’europe)’도 만나볼 수 있다. 생 라자르 역 앞에서 점프하고 있는 이 신사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담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작가는 주로 흑백 사진 작품을 남겼는데, 당시 컬러 사진은 감도가 낮고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그에게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적시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종종 맹렬한 순간을 촬영하던 작가에게는 흑백 사진이 순간을 담기 더 적합했다. 또한 흑백사진은 당시 컬러사진보다 음영 값을 더 폭넓게 시각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소의 공간감 표현에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신사 뒤에 붙은 서커스 포스터에는 다른 방향으로 점프하는 실루엣이 있는데, 이 둘의 대칭적인 몸짓이 신사의 제스처에 역동성을 더해주고 있다. 셔터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물웅덩이에 닿았을 신사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수식어가 제격인 이 작품은 색이 바랬음에도, 여전히 사진계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사진가들은 이처럼 흑백의 단순함 속에서, 빛, 감도, 톤, 그림자, 텍스처에 집중하며 작품 의도와 작품관을 다양하게 표현해 나갔다. 검정과 흰색 특유의 단조로움과 대비의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흑백사진이 사진의 한 표현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할 것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에서 열리는 ‘누아&블랑(Noir & Blanc)’ 전시는 2024년 1월 21일까지, ‘에프르브 두 라 마티에르(Épreuves de la matière)’ 전시는 2024년 2월 4일까지 열린다. ‘Épreuves de la matière’ 전은 현대 사진작가들이 자신만의 사진 기술을 만드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방법과 과정, 도구에 대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