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리멸렬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영화]사랑은 낙엽을 타고

[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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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희망의 건너편'을 발표하고 영화감독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감독이 새로운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돌아왔다. 은퇴를 선언 해놓고 이를 번복하는 감독들이 비단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의 복귀 또한 대가들의 변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비춰질지 모른다.

만약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에 대해 별 흥미를 갖지 못했고, 그의 은퇴와 복귀에 대해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관객이라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만큼은 충분히 주목해볼만 하다. 이전 작품들을 통해 이어왔던 그의 세계관이 더욱 깊고 넓어진 것은 물론, 지극히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 그 어떤 작품보다도 사랑스러운 신작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다시 복귀해야만 했던 이유를 '사랑은 낙엽을 타고' 속에서 촘촘히 살펴본다.

두 외로운 영혼의 만남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인사하는 안사와 홀라파
슈퍼마켓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안사'와 공장에서 공기 프레스를 다루며 각종 먼지를 털어내는 '홀라파'가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의 공통분모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점, 외롭고 쓸쓸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는 점 뿐이다. 그들의 일상은 지리멸렬하다. 일터와 집을 오가는 반복되는 일상은 그들에게 전혀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조건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워 보인다.

그들에게 사랑을 허락하는 것은 감독의 의지다. 감독은 그들이 결국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무미건조한 삶에 활력을 주려는 의도를 넘어선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시선뿐만 아니라 나 자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바꿔낼 힘을 지닌다. 그 힘을 통해 두 인물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까지도 변화시킨다.

망할놈의 전쟁

안사는 집에서 줄곧 라디오를 켜 놓는다. 라디오에서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된다.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안사의 일상과 달리 라디오 속 세상은 지극히 초현실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사건과 지리멸렬한 안사의 일상은 절대 하나의 시공간으로 묶일 수 없다. 라디오를 듣다가 채널을 놀리고, 전원을 뽑아버리는 안사의 행동은 이를 반증한다. 홀라파와 처음 집에서 저녁을 먹는 순간에도 그녀는 라디오를 켰다가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뉴스 소식에 “망할놈의 전쟁”이라며 꺼버린다.

안사가 처음으로 내뱉은 전쟁에 대한 코멘트는 충분히 중의적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지구적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현과 어색한 분위기를 로맨틱하게 바꿔보고자 튼 라디오가 오히려 분위기를 깨고 있음에 대한 당황의 표현을 모두 담고 있다. 전자가 거시적 관점에서 휴머니즘의 시선을 내포한다면 후자는 미시적 관점에서 영화 속 캐릭터의 상황을 주목하게 한다. 전자가 감독의 시선이자 목소리라면 후자는 극중 안사의 목소리이자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짐 자무쉬의 <데드 돈 다이>를 감상하는 안사와 홀리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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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안사와 홀리파가 감상하는 영화는 짐 자무쉬 감독의 '데드 돈 다이'다. 소비 자본주의에 오염된 대중들이 좀비가 되어 외딴 마을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풍자극을 안사와 홀리파가 극장에서 보는 것은 감독이 적극적으로 의도한 바이다. 짐 자무쉬 감독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서로 친한 관계이기 때문에 친구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데드 돈 다이'를 삽입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좀비가 되어버린 마을 사람들과 마치 좀비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안사, 홀리파가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임은 쉽게 연결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에게는 바로 옆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을 무미건조하게 살아내고 있는 대중들이 마치 좀비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 짐 자무쉬 감독이 그러한 시선으로 '데드 돈 다이'를 만들었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열망을 작품 속에 내비친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극장은 스크린에 펼쳐진 환영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을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 속엔 바로 이러한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런 그들에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자꾸만 현실로 잡아 끄는 기재로서 환상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관객은 안사와 홀라파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지만 틈틈이 끼어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그들의 사랑이 한편으로 배부른 짓이자 비극을 외면하는 비겁한 행동이라며 자꾸만 죄책감을 안겨준다.


우리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집에서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는 안사와 홀리파의 로맨틱한 순간
극적 장치를 의도적으로 깔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끝까지 안사와 훌리파에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마치 현실은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끝까지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 사랑의 가능성을 밀어붙인다.

결국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그들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쉽게 점칠 순 없다. 그들이 함께하게 될 집에서는 여전히 라디오의 전쟁 소식이 전해질 것이며 고도로 진화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비극이 아닌 코미디 장르인 것은 감독이 의지적으로 두 사람의 미래에 희망의 빛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비극적인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작은 힘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영위하고 이어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임을 전한다. 어쩌면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새로운 작품으로 복귀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일상을 살아내며 서로 사랑하라는 지령을 내리기 위해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펼쳐 놓은 무미건조한 미니멀의 세계 이면에 자리 잡은 뜨거운 생에 대한 찬가를 '사랑은 낙엽을 타고' 속에서 반드시 발견해 볼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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