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은 수족관이 되고, 재봉틀은 자동차… 박기일 개인전 '장소 없는 장소'

Fish in the cellar, acrylic on canvas, 725x91cm, 2022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실에는 바닥에 물이 차 있다. 이 곳에는 물고기들이 살고 아이 하나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듯 그물망을 어깨에 메고 서 있다. 상상 속에서 그려 볼만한 장면 같지만 사실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박기일 작가가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낸 캔버스 위에 옮겼다. 어린 시절 홍수로 자기 집 지하실에 물이 들어차자 그곳에 물고기를 풀어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소 없는 장소’ 전시회에서는 박기일 작가의 거짓말 같은 추억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가 2018년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으로, 30여점의 그림이 걸렸다.
Dux, acrylic on canvas, 1455x97cm, 2022
‘장소 없는 장소’라는 전시 제목처럼 박 작가가 내놓은 작품 속의 배경은 이미 사라져버렸거나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들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첫 작업으로 그린 ‘해바라기’도 옛날에 사라진 동네에 대한 기억을 담았다. 그가 어린시절 대부분을 보냈지만, 지금은 지역 발전으로 인해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김포 평야’다. 그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캐릭터와 비슷한 인물을 그려넣으며 마치 옛 이야기로 관객을 안내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Mishin Rider, acrylic on canvas, 100x1995cm, 2022
이번 전시에 나온 박기일의 작품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에 걸쳐 있다. 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미싱 라이더’다. 작품 속 소년은 미싱기에 앉아 척박한 사막을 풍경으로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독수리오형제 헬멧’을 쓰고 질주하고 있다. 이 소년은 작가 박기일 자기 자신이다. 어린 시절 집에서 오래된 미싱기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놀던 추억을 비현실적인 상상을 섞어 담아냈다.

박기일이 가진 가장 큰 기법적 특징 중 하나는 에어브러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사실적이고 디테일하지만, 붓자국 등 '그린 흔적'은 잘 찾아볼 수 없다. 에어브러시를 쓸 경우 붓으로 칠하는 것보다 물감이 매우 얇게 칠해져 물감의 두께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Blaze up, acrylic on canvas, 180x90cm, 2023
얇고 생생함을 주는 에어브러시 기법 때문에 그의 그림은 프린터로 출력한 인쇄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불기둥’ 속 타오르는 불꽃이 그의 기법을 생생히 드러낸다. 불과 함께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는 마치 움직이는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불놀이, acrylic on canvas, 1622x1035cm, 2022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아내 친구의 딸이나 친한 친구의 아이들을 모델로 섭외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한 작품에 오랜 기간을 쏟기 때문에 작품 사이사이마다 성장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초현실처럼 현실을 그리는 그의 전시는 12월 30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