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는 예수보다 부엌데기 여자 얼굴을 더 크게 그렸다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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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방텅 빈 복도에 검은 옷차림의 여성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침묵과 신비감이 감도는 이 작품은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인테리어'(1905)다. 여성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방에 속하지 않는다. 방과 방 사이 애매한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이윤희 지음
이른비
288쪽│1만8500원

부엌은 오랫동안 여성의 공간이었다. '요섹남'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부엌을 '금남 구역'으로 두는 문화권도 적지 않다. 이러한 풍조는 예술에도 반영됐다. 볼프강 하임바흐의 '창 뒤에 주방 하녀가 있는 아침 식탁'(1670)을 보면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이 일화를 다룬 대부분 작품이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동생 마리아에 초점을 맞췄다. 집안일보다 예배가 우선이라는 당시 사회적 맥락을 따른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달랐다. 부엌에 있던 언니 마르다의 뾰로통한 표정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싶지 않았겠나. 저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배움과 부엌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은 결국 두 사람 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꿈꾸는 방'이라는 책 제목은 '자기만의 방'을 향한 그림 속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을 떠오르게 한다. 책이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작품은 정정엽의 '먼 길'(2020)다. '인테리어'의 여성이 비좁은 복도에 갇혀 있던 것과 달리, 여기서 여성은 드디어 탁 트인 바다와 육지 사이에 서 있다. '먼 길'이 걸려 자유로운 바다에 도착했다는 의미일까. 작품은 여러 생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