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집단지성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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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논리에 갇혀 설 자리 잃어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은 최고의 영어사전이다. 권위에 걸맞게 1857년 집필 계획 수립 이후 무려 71년에 걸쳐 작업했다. 사전에는 표제어 41만 개와 예문 182만 개가 수록됐다. 주목할 것은 OED가 크라우드소싱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약 3000명이 제작에 참여했는데 면면이 다양하다. 3명의 살인자, 채식주의자인 교구 목사와 카를 마르크스의 딸도 포함됐다. 많은 참여자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독학도였다.
집단지성 회복은 결국 시민 몫
박희권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집단지성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위키피디아와 같은 협업이 이미 19세기에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사실 ‘지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인류공동체의 능력’을 뜻하는 집단지성은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집단지능을 활용한 꿀벌과 개미가 1억 년 이상 생존했듯, 인류도 집단지성을 활용해 생존·번영해 왔다. 파종, 수확, 관개 등 농경술을 공동으로 발전시켰고 지식과 노동을 공유해 피라미드와 스톤헨지 같은 거대 기념물을 건설했다. 지식과 경험의 공유는 자원 관리, 분쟁 해결, 환경 변화 등 도전 극복에 기여했다.정보화 시대에 집단지성의 중요성은 점증하고 있다. 정보의 생산·유통과 소비가 폭증하면서 집합적 문제해결 능력의 기반이 확대되고 있다. 가상세계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집단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우리에게도 집단지성은 특히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해체, 북한의 실존적 핵 위협과 미·중 갈등으로 인한 지정학적 위기 등 복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문제해결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교육 수준과 디지털 인프라를 갖춘 한국에서 집단지성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사회적 이슈의 공론화 과정은 이성적 토론보다는 감정적 대립으로 끝나기 일쑤다. 정치인들은 시장경제 원칙을 무시한 포퓰리즘 정책을 양산해 낸다. SNS에는 근거 없는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대외관계에서도 흑백논리와 부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감정적 여론이 국익에 입각한 냉철한 대응을 어렵게 한다. 한국이 집단지성의 배신에 직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집단주의, 권위주의 문화유산을 들 수 있다. 집단지성이 작동하기 위한 주요 요소는 구성원의 인지적 다양성과 독립성이다. 집단지성은 다원적 시각과 가치가 공존하는 열린사회에서 꽃을 피운다. 잘못된 사실과 의견에 순응하거나 의견 경로가 특권화하는 문화에서 집단지성은 집단 광기나 집단 어리석음으로 변하기 쉽다.둘째, 정치 양극화도 집단지성에 척박한 토양을 제공한다. 한국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은 이념과 이익을 넘어 감정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이는 상대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혐오 문화를 확산하고 ‘우리 vs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촉진할 뿐 아니라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국회에서 타협 실종으로 법안 통과가 지연되는 ‘입법 교착’ 현상과 반지성의 팬덤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영 논리에 갇힌 환경에서 미래를 위한 협력적 집단지성은 설 자리가 없다.
공동체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하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집단지성 회복에 있다. 여기엔 통합과 연대를 위한 정치개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파편화한 정치 현실에 비춰 정치개혁은 현재로서는 기대난망이고 결국 회복의 궁극적 책임은 시민 몫이다. 사회적 이슈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하고, 객관적·이성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며, 사실 확인을 통해 허위 정보의 확산을 방지하는 등 시민의 깨인 의식만이 집단지성을 위협하는 인지편향을 방지할 것이다. 언론의 책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