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다귀 같은 '오징어 게임'에 클래식 흘려넣은 정재일의 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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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수민의 커넥트아트
2023년 11월 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 예고편
넷플릭스 CEO가 적극 홍보한 '오징어 게임' 리얼리티 버전
K콘텐츠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던 2021년, 또 하나의 대박 콘텐츠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습니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방영된 지 1달도 안 되어 넷플릭스가 정식으로 서비스되는 나라 중 인도를 제외하고 모든 국가에서 시청률 1위를 달성했죠. 황동혁 감독은 이미 2009년에 '오징어 게임'의 각본을 완성했으나 2019년에 넷플릭스에서 투자받기 전까지는 마땅한 투자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요.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상이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결국 가족과 친구, 협력과 배신, 생존과 죽음 등 전 세계인의 공감을 사는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탄탄한 스토리가 제일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또 기괴하면서도 동화적인 연출, 1970~19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색감, 연기파 배우들 또한 드라마에 감칠맛을 더했고요. 덕분에 '오징어 게임'은 2022년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감독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최초 비영어권 드라마 수상 기록을 세웠습니다.2023년 11월 말에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기본 틀을 따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가 넷플릭스에서 개봉되었고 총괄 제작을 맡았던 넷플릭스 CEO 스티븐 램버트가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전 세계에서 모집된 456명의 참가자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출연하여 각자의 개성대로 게임에 참여했죠. 중간중간 참가자들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인터뷰를 보여주는데 다양한 인간 군상을 파악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오징어 게임'속 클래식 음악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클래식 음악들은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생활공간에서 쪽잠을 청하는 참가자들의 기상 음악으로는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이, 배를 간신히 채울 정도의 적은 양의 음식이 주어지는 식사 시간에는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이, 사형대에 끌려가는 죄수들처럼 줄지어 계단을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집니다.456억이라는 상금을 받기 위해 456명이 매 순간 목숨을 걸고 게임에 도전하는 피 말리는 상황에 클래식 음악이라니…. 음악감독의 위트가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이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죠.①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
분주하게 음표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뚫고 나오는 트럼펫 솔로의 청량한 음색이 인상적입니다. 작곡 당시 60세가 넘은 하이든은 빈 궁정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인 안톤 바이딩거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트럼펫 협주곡'을 작곡했고, 개량된 트럼펫의 매력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는 곡이 탄생했습니다. '오징어 게임' 이전에 '장학 퀴즈' 시그널 음악으로 쓰였던 곡이라 더욱 친숙합니다. ②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차이콥스키가 현악기 구성만을 위해 작곡한 실내악 곡입니다. 현악기 특유의 따뜻한 음색은 2악장에서 빛을 발하는데 각 악기군이 테마 멜로디를 번갈아 연주합니다. 바이올린 파트가 멜로디를 연주할 때는 천진난만함과 경쾌함이,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멜로디를 연주할 때는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③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
2023년 초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정재일 음악감독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작곡가 정재일은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 "나는 근본 없는 작곡가"라고 말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죠. 음악 교육도 중학교 시절에 서울 재즈 아카데미에서 작곡과 편곡을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정재일은 '오징어 게임'의 테마 음악을 두고 "일부러 아이들이 부는 것처럼 엉성하게 리코더를 불었다. 리코더뿐만 아니라 소고, 멜로디언, 캐스터네츠 등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기괴하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근본 없음’이라는 약점이 그에게는 강점으로 작용하여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정재일표 음악 어법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새 앨범 <Listen>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곡가 정재일
2023년 12월 15일과 1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작곡가 정재일의 단독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저는 첫날인 15일에 콘서트를 다녀왔는데 '오징어 게임' OST뿐만 아니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 OST,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OST, 올해 초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데카(Decca)에서 발매한 피아노 솔로 앨범 'Listen'의 수록곡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가 서로의 가슴에, 자연에, 지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느꼈다"라며 앨범 제목을 'Listen'이라고 지은 이유를 말했습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긴 흰색 와이셔츠, 스키니 진, 리본을 야무지게 맨 스니커즈를 등장한 정재일은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복장과는 다르게 음악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된 이 공연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악기인 피아노 앞에 주로 앉아 있었지만 곡에 따라 일렉트릭 기타, 클래식 기타, 리코더 등 다양한 악기 연주, 오케스트라 지휘를 선보였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매 순간 몰입하는 모습,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음악에 혼을 담는 모습이 음악에 설득력을 더해주었죠. 다시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와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클래식 음악을 선곡한 음악감독 정재일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에게 음악은 언어보다 자연스럽고 편하다"는 그의 인터뷰 답변처럼 거추장스러운 수식어 없이도 직관적으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장르가 클래식 음악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독자분들의 감정을 닮은 클래식 곡들은 어떤 곡들일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