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2위 악단의 정면승부...같은 듯 달랐던 서울시향과 KBS의 '합창'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향이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오 친구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오! 좀 더 즐겁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막막한 현실에도 인류애와 평화를 외쳤던 베토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에 이러한 문구를 직접 써 넣었다. 평화와 형제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베토벤의 합창은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는 '단골' 레퍼토리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지난주 국내 양대 오케스트라인 KBS교향악단(20일)과 서울시립교향악단(21일)은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이어 베토벤 합창 교향곡을 선보였다. 연말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선곡으로 관객들의 큰 박수를 받았지만, 연주 자체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75분 짜리를 '60분'만에...'베토벤 정신' 담기엔 다소 빨랐다

서울시향의 공연은 내년부터 정식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 얍 판 츠베덴이 이끌었다. 이들이 빚어낸 합창은 첫 소절부터 청중을 놀라게 했다. 너무 빠른 연주 속도 때문이었다. 전 악장 완주에 통상 70~75분 가량 걸리는 이 교향곡을 60분 만에 끝내버렸으니.

합창 교향곡은 ‘적정 템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이란 점에서, 빠른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감상 포인트는 지휘자가 설정한 템포를 악단이 얼마나 잘 따랐는 지, 그래서 얼마나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줬는 지에 있다.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향이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의 전반적인 평가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큰 폭의 셈여림, 악상 변화로 극적인 장면 전환을 이룬 츠베덴의 명료한 지휘와 이에 반응하는 악단의 호흡은 좋았다. 다만 합창 교향곡은 인류애, 평화, 환희 등 베토벤의 정신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구조적 완결성과 짜임새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데, 이날 연주에선 이를 제대로 구현할 ‘여유’가 빠져있는 모양새였다.

1악장 도입부부터 그랬다. 이 구간에선 조성을 확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화성과 거의 들리지 않는 호른의 울림,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은 현악기의 트레몰로(같은 음이나 화음을 반복적으로 연주) 등이 켜켜이 층을 이루면서 일순간 터뜨리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백미인데, 그 매력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각 성부의 소리가 층을 이뤄 하나로 모여들어야 하는데, 무른 땅 위에 집을 지으려다보니 선율이 입체적으로 흐르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향이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냉소적이면서도 강렬한 2악장 스케르초, 숭고한 서정이 담긴 3악장 아다지오를 거쳐 등장하는 이 교향곡의 귀결점인 4악장까지, 악곡의 성격이 다소 흐릿하게 전달되긴 했지만 서울시향은 전반적으로 좋은 소리를 냈다. 급한 템포를 따라가느라 관악기군에서 이따금 호흡이 어긋나곤 했지만, 전체적인 밸런스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현악기군은 줄곧 안정적인 기교와 앙상블로 지휘에 반응했다. 서울시향의 탄탄한 기본기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인류애를 부르짖는 마지막 악장에선 합창단(국립합창단·고양시립합창단)의 밀도 있는 음향과 선명한 선율 표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서울시향은 전경에 자리할 때 또렷한 음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후경으로 빠지면서 이들과 나쁘지 않은 조화를 이뤘다. 서선영(소프라노)·양송미(메조소프라노)·김우경(테너)·박주성(바리톤) 등 솔리스트도 강렬한 목소리로 베토벤의 메시지를 또렷하게 들려줬다. 객석에서 박수 갈채가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온건하고 정통한 해석...임팩트 남기기엔 아쉬웠던 앙상블

피에타리 잉키넨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연주했다. 사진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 KBS교향악단 제공
피에타리 잉키넨이 이끄는 KBS교향악단도 예년처럼 올해 마지막 공연을 '합창'으로 꾸렸다. 지난 20일 연주에는 홍혜승(소프라노)·김정민(메조소프라노)·박승주(테너)·최기돈(바리톤) 등 4명의 솔로 성악가들과 180여 명의 합창단이 참여했다. KBS교향악단은 군대처럼 일사분란한 서울시향과는 다른 분위기의 합창을 선보였다. 잉키넨은 안정적인 템포로 온건한 해석을 들려줬다. 하지만 1년 만에 합창을 무대에 올린 탓인지, '단단하고 꽉찬 느낌이 안들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군데군데 앙상블이 틀어지기도 했다.

'고요 속의 긴장'을 살려내는 게 숙제인 1악장 도입부를 잉키넨은 섬세한 톤으로 그려나갔다. 잉키넨은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란 악보의 템포 지시어를 잘 따랐다. 노래가 나오는 대목에선 성악가의 목소리가 악단의 연주에 묻히지 않도록 살폈다.

2악장에선 몰아치듯 경쾌한 템포로 얼굴을 바꿨다. 이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리듬이 뭉개지듯이 들리면서 활력이 반감됐다. 뭉개짐의 원인이 콘서트홀의 울림 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둔탁함을 보완해준 건 팀파니의 각진 사운드였다. 그 덕분에 조금씩 활력을 되찾았고, 3악장에선 삐걱거리던 파트간 앙상블도 살아났다.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피에타리 잉키넨. KBS교향악단 제공
그렇게 폭풍 같은 4악장이 열리자, 성악가들도 얼굴을 드러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더블베이스의 묵직한 '환희의 송가' 선율에 현악기 소리가 더해지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이윽고 등장한 바리톤의 레치타티보(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창법), 그리고 솔로 성악가들과 합창단의 웅장한 응답까지. 기악곡에서 성악곡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파격적인 구조. 베토벤을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원 픽'으로 만든 일등공신중 하나다. 이날 4악장에선 성악가들의 중창과 오케스트라의 호흡이 이따금 어긋났지만, 잉키넨의 빠른 판단으로 적절하게 조율해갔다. 70분에 달하는 장대한 길이와 합창단까지 등장하는 대규모 편성을 감안할 때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아쉬움과 함께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남겼다.

김수현/최다은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