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역경 뚫은 K벤처 '황금 빈티지'

이정호 스타트업부장
빈티지(vintage)는 와인 양조에 사용된 포도를 수확한 연도를 말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좋은 와인을 탄생시키는 제1의 조건은 원료가 되는 포도 품질이다. 일조량, 강우량, 기온, 바람 등 유럽의 변덕스러운 날씨 변수 탓에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빈티지에 따라 맛과 당도가 달라진다. 와인 애호가들이 꼼꼼히 빈티지를 따지는 이유다. 황금 빈티지를 결정짓는 여러 요인은 봄에 포도나무 꽃이 피는 시기부터 영향을 끼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수확 직전이다. 이 시기 충분한 햇빛과 적은 강수량이 필수 조건이다.

벤처 투자 여건 무르익어

벤처·스타트업 투자 시장에도 빈티지가 있다. 벤처펀드가 결성된 해를 일컫는데, 언제 수확된 포도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와인 평가가 달라지듯 투자도 어느 해에 시작했는지가 중요하다. 벤처캐피털(VC)이 조성하는 벤처펀드는 그해 경기 흐름, 금리 수준, 유동성 등 시장 상황과 투자 대상이 되는 벤처·스타트업의 사업성에 따라 빈티지가 갈린다.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대표적인 황금 빈티지는 2008년이었다. 벤처펀드 청산이 완료된 2004년부터 2021년 중 2008년 결성된 벤처펀드의 납입액 대비 총가치(TVPI)가 3.58배로 가장 높았다. 금융위기 후 기업가치가 하락한 시점에 투자한 펀드들이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는 얘기다.

지난 2년 벤처투자 혹한기를 지나오면서 알짜 벤처·스타트업의 가치는 떨어질 만큼 떨어졌고, 반대로 기대 수익률은 오를 만큼 올랐다. 내년 한 해가 투자의 최적 시기라는 시장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투자 여건도 무르익고 있다. 투자 시기와 대상을 저울질하는 사이 금고에는 현금 실탄이 쌓였다. 경기 회복과 고금리 기조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대형 VC들도 올해 대비 투자 규모를 대폭 늘리는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짜놓고 있다. 곧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게 투자 업계의 전망이다. 정부도 지원 사격에 나선다. 모태펀드 등 정부의 벤처창업 관련 예산은 내년 1조4452억원으로 올해보다 9.2% 늘어난다.

혹한기 견디며 체질 개선

비바람과 온갖 스트레스를 견뎌낼수록 더 좋은 맛을 내는 포도나무처럼 꽁꽁 얼어붙은 생사 갈림길을 넘어온 스타트업은 속이 꽉 찬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돈줄이 마른 상황에서 비핵심 자산 매각, 인력 구조조정, 피벗(사업 전환), 해외 진출 등 사업 효율화와 체질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 만난 창업 8년 차 스타트업 대표는 “사업 초기 데스밸리를 넘을 때보다 올 한 해 체감한 공포의 크기가 몇 배 더 컸다”며 “역설적으로 회사가 돌멩이처럼 가장 단단해진 시기”라고 했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한다. 가장 어둡고 모두가 위축돼 있던 시기, 그 기회를 잡은 혁신 기업·투자가들이 기존 판을 흔들며 200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ICT) 시대의 초압축 성장에 힘을 보탰다. 새로운 10년 아니 50년의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를 이끌어갈 제2의 네이버·쿠팡·토스 후보 업체들은 지금 거친 숨을 내쉬며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최고의 당도를 품은 명품 포도나무처럼 지금의 역경을 뚫고 2024년 황금 빈티지의 주인공으로 빛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