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오랜 여운=연말 영화의 정석, ‘로맨틱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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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윤성은의 Cinema 100연말에 볼 만한 영화로 한 편의 추천작을 고르는 일은 치킨을 주문할 때 후라이드냐, 양념이냐, 간장이냐를 갈등하는 순간 이상의 신중함과 배려심이 요구된다. 아니, 해가 갈수록 연말 영화의 대열에 끼어드는 작품들이 많아져서 이제는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저마다의 향기로 유혹하는 진열장의 탕후루 중 하나를 권하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추천하는 사람의 취향을 탄다. 그러나 취향에도 그럴듯한 변(辯)을 달 수 있는 것이 평론가다.
우선, 연말에도 블랙 코미디나 비장르 영화를 보게 되면 새해를 우울하고 삐딱하게 시작할 것이며, 뇌세포들을 마비시키는 액션이나 판타지는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게 만들 것이고, 공포물은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그래야 연인이 있든 없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크리스마스에는 로맨스 영화가 가장 무난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로맨스물에도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최루성 멜로드라마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니, 소소한 웃음과 감동을 주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만 남겨보자. 결론은 로맨틱 코미디. 이 장르가 이 시즌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로맨틱 홀리데이’(감독 낸시 마이어스, 2006)로 말하자면, 개봉한 지 20년이 채 안 되었음에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불릴 만큼 크리스마스에 많이 소환되는 작품이다. 물론, 배경이 정확히 이 시즌이라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장르의 전형성을 그럴 듯하게 전시하는데 그쳤다면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고 싶은 대표적 로맨틱 코미디로 꼽을 명분이 부족하다.
이 영화에는 로맨스 외에 일탈과 모험에 대한 판타지가 있고, 주인공(중 한 명)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목표 외에도 이웃과 교류하고 그가 성장하도록 도와야 하는 과제가 함께 주어진다. 연인은 오히려 후자를 성공리에 수행하자 따라오는 부상 같은 것이다.영화는 멀리 떨어져 살던 두 여성이 집을 교환하는 프로그램에서 만나 일탈을 감행하는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고편 제작사 사장인 ‘아만다’(카메론 디아즈)는 바람난 연인을, 웨딩 칼럼니스트인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는 오랫동안 좋아하던 직장 동료를 잊기 위해 낯선 공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들은 서로의 집을 빌려주기로 합의하자마자 짐을 싸서 비행기를 탄다.
‘서울쥐와 시골쥐’의 주인공들처럼, 런던 근교의 시골집에 도착한 도시 여자 아만다와 LA의 대저택에 도착한 시골 여자 아이리스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면서 휴가를 시작한다. 이들은 공히 이웃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아만다는 아이리스의 오빠 ‘그레엄’(쥬드 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친구인 ‘마일스’(잭 블랙)와 가까워지면서 로맨스의 두 축이 형성된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사업가인 아만다가 딸이 둘이나 있는 시골남자에게 빠져드는 부분은 남성들의 판타지에 가깝지만, 아이리스와 마일스가 호감을 느끼는 과정은 꽤 설득력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가 잘 통하는 데다 연로한 시나리오 작가 ‘아서 애벗’가 공로상 시상식에 참석하도록 도와주면서 생기는 유대감 등도 그들의 감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둘 다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낸 직후라는 점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장르적 허용이 가능한 정도다.무엇보다 아이리스는 연애에 대해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멋진 캐릭터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했던 ‘재스퍼’(루퍼스 스웰)가 LA까지 찾아왔음에도 다시 그에게 돌아가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아서와 함께 시상식에 참석한다.아이리스가 아서의 팔짱을 끼고 시상식장으로 들어가자 수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그들을 맞아주는데, 이것은 극적 맥락에서 막 과거의 못된 연인에게서 벗어난 아이리스를 향한 박수이기도 하다. ‘로맨틱 홀리데이’가 관객들에게 여느 로맨틱 코미디보다 더 만족감을 주고 특별하게 각인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그레엄을 뒤로 하고 공항으로 향하던 아만다가 다시 차를 돌리는 장면, 그녀가 눈길 위를 뛰어서 그레엄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혹자는 너무 식상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는 이처럼 충동적인 사랑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보기에, 이해불가한 신은 아닐 것이다. 가볍고 말랑말랑하면서도 그 분위기와 감정의 여운이 오래 남는 겨울 로맨스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