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만 볼 것인가… '책타짜' 12명이 꼽은 '올해의 책'

'아르떼' 필진 출판사 편집자 12명의 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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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얼굴을 보여주던 책이 등 돌리고 있으면 '아, 내 책의 수명은 이제 끝났구나' 생각해요." 어느 작가의 말이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나 신간 자리에 진열됐던 자신의 책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귀퉁이로 옮겨지면, '더 이상 내 책을 발견해줄 독자가 있을까'란 안타까움이 몰려온다고 했다.

2023년에도 '빛나는 책'들이 수없이 나왔다. 그 중에는 미처 당신이 발견하지 못한 사이에 등을 돌렸던 책도 있다. '책 덕후'들의 추천은 바쁜 일상 탓에 놓쳐버린 '인생 책'을 다시 마주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한국경제신문은 국내 최대 문화예술 포털 아르떼에 '탐나는 책' 서평을 연재하고 있는 주요 출판사 편집자 12명에게 '올해의 책'을 한 권씩 추천 받았다.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의 책은 제외했다.

○내년엔 다시 소설에 빠져볼까

올해 베스트셀러는 <세이노의 가르침>을 위시한 자기계발서가 휩쓸었지만, 12권의 '올해의 책'은 소설판이다.

을유문화사의 을유세계문학전집은 '책의 재발견'이라는 키워드에 걸맞는 시리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간행했던 해외 걸작선에 포함된 작품을 재발굴해 새롭게 번역했다. 정기현 민음사 편집자는 이 시리즈 중 125번 째 책인 버나드 맬러머드의 <점원>을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허름한 거리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모리스의 나날을 다룬 소설이다.
정 편집자는 "숨막힐 만큼 작은 공간에 대해 말하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이 소설을 만났다"고 했다. 먼지 냄새가 나는 건조하고 어두운 작은 가게, 그 곳에 붙들린 것처럼 평생을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설이 전하는 막막함이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묘한 위로를 준다는 설명이다. "답답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읽어 나가며, 마치 그들의 동료가 된 것 같았어요."
한번 읽었더라도 다시 읽었을 때 새로운 해석을 안겨줄 만한 책도 있다. 이재현 문학동네 편집자가 추천한 정지돈의 연작소설집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이 그런 경우다. ‘나’와 ‘엠’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을 배경으로 산책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네 편의 연작 소설이 ‘모빌리티(mobility)’에 대한 통찰로 엮인다.

50자가 넘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정지돈이라는 저자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예술가를 인용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채로운 질문을 던지는 실험적 소설이다. 이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해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 물었던 정지돈의 탐구는 현재진행형"이라며 "그 부단히 변모하는 형식과 내용이 시대를 앞서 예감한다"고 했다.
구미가 당기는 추천평이 이어졌다.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장은 교보문고가 집계한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됐던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추천하며 "(모든 역량이 완벽한) 육각형 한국소설의 발견"이라며 "한때 이 소설로 어지러운 세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서효인 안온북스 대표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아름답고 명료하다는 말이 더는 어울릴 수가 없다"며 "주인공의 기억과 사고, 고민과 결단을 따라가는 일 자체로 하나의 인생이 완성된다"고 평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에 빠져들고 싶다면 최지인 인플루엔셜 한국문학팀장이 추천한 구병모의 <로렘 입숨의 책>이 제격이다. 최 팀장은 "책을 열면 시간이 뚝딱 사라져버리는 마법의 책"이라며 "난해한데 빠져들고 낯선데 매혹적이라 분량은 짧은데 오래 곱씹게 되는 열세 편의 미니픽션집"이라고 설명했다.
김성태 김영사 편집자는 이서수의 첫 단편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을 추천하며 "이서수 작가는 세상이 외면해선 안 되는 목소리를 내왔다"며 "가장 취약한 자리에서 굳건하게 사는 사람들의 사실적 이야기가 각별하다"고 했다.
박선우 마음산책 편집2팀장이 "소설을 가르치는 과정과 삶의 의미 있는 순간들이 겹치며 아름다운 장면들을 빚어낸다"고 평한 건 문지혁의 <중급 한국어>. 박 팀장은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다정하고 면밀하게 살피는 시선도 애틋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김동휘 난다 편집자는 2021년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故) 이은용 극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를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김 편집자는 "무대 밖의 삶들을 기어이 무대 가운데 올려놓고서, 정작 너무 일찍 무대를 떠난 작가를 그리워하며"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했다. 책 앞머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여기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내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연말은 한 해를 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기 좋은 때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이 추천한 송길영의 <시대 예보: 핵개인의 시대>는 내일의 날씨에 대한 '일기예보'가 아니라 더 큰 호흡의 '시대예보'를 말한다. 정 편집주간은 "트렌드 실종이 트렌드인 시대, 이 책은 각자 스타일대로 건강하게 교류하며 잘 살아갈 방법을 전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미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고령화' 그리고 '1인 가구'다.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은 김희경의 <에이징 솔로>를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이 책은 그간 1인 가구 논의에서 공백처럼 남아 있던 비혼 중년의 삶을 조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혼자 살아가는 비혼 중년으로서, 자신처럼 혼자 사는 40·50대 비혼 여성 19명을 만나 한국 사회에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외로움에 대처하고 친밀감을 만들어 가는 방법, 노후를 준비하는 여정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최 편집장은 "고령 인구와 1인 가구가 급증하는 한국 사회에 매우 시기적절한 기획"이라며 "혼자가 될수록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책"이라고 했다.
페미니즘 역시 한국 사회의 영원한 화두다. 박은아 글항아리 편집자는 정희진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추천했다. 한국 페미니즘의 교과서 <페미니즘 도전>을 18년 만에 다시 쓴 책이다.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을 다뤘다. 박 편집자는 "여전히 공부하고 사유하고 개입하는 사상가의 현존을 도전의 계보와 거대 정신의 압력 속에서 확인시켜주는 동시대적 텍스트가 반갑다"고 평가했다.
김현주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은 안드레아스 말름의 <화석 자본>을 '올해의 책'으로 꼽으며 "번역되길 오랫동안 기다려온 책"이라고 했다. 이 책은 화석연료 체제의 기원을 살피며 기후 재앙에서 벗어날 방도를 모색한다. 김 편집장은 "기후 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 그 자체임을 훌륭하게 드러낸다"며 "인류라는 종 내부의 분열을 평가절하하는 인류세 서사를 날카롭게 논박하는 부분도 흥미롭다"고 읽기를 권했다.

구은서/임근호/안시욱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