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거대한 '가체'위에 누운 여인…그녀가 필라델피아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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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경윤의 아시안 아트 in US필라델피아 미술관 '시간의 형태'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 오인환과 유니 킴 랑을 온라인으로 만났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시간의 형태' 작가 인터뷰
유니 킴 랑과 오인환의 예술세계
얼핏 보면 매우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이다. 오인환은 대학원 때 미국 유학 경험을 제외하면 토종 한국인 작가다. 유니 킴 랑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말도 배우기 전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마친 재미교포 작가이다. 서로 추구하는 매체도, 다루는 주제도 다르다. 성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도전이나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문화적 정체성은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운 주제는 아니다. 인터뷰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낳은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자아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들여다 봤다. 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고립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개인과 집단의 가치는 어떻게 형성되고 상충하는 걸까?
오인환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실험적 형태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 문화적 이슈를 특정 시공간 안으로 끌어내는 데 집중한다. 특히 한국에 거주하는 퀴어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개념적 요소들을 탐구하고 해체하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임 중이며,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오인환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의 형태” 전시에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필라델피아”를 출품했다. 2005년 코펜하겐 샬로텐보그를 시작으로 서울서예박물관과 예술의전당 등지에서 선보였던 장소 특정형 설치작품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연작 중 일부이다. 이번 작품은 퀴어씬이 활발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의 역사를 반영했다.
작가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게이 바와 게이 클럽들의 이름을 시멘트 보드 위에 짙은 붉은색의 향가루를 쌓아 올려 조각했다. 원래대로 라면 전시 시작과 함께 조각에 불을 붙여 전시가 끝나는 날 글씨가 모두 타면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내부 화재 경보 시스템 등의 이유로 전시장 안에서 향을 피우진 못했지만, 이전의 기록 영상을 통해 향이 타들어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향은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냄새는 개인의 기억 속에서 특정 사람이나 장소,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서 소환된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 끊임없이 각색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오인환은 향이 가지는 매개체의 성질에 집중한다. 후각적 자극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잘 기억되지 않거나 잊혀지기 쉬운 게이 커뮤니티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동시에 향은 시간성을 강조한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물질성을 통해 작가는 고정된 정체성이나 신념에 물음을 던진다. 또한 관람객은 글씨라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통념과 개인의 경험을 연결시키게 된다.
오인환은 이런 기억의 불안정성, 향의 시간성과 물질성, 시각과 후각이라는 신체적 감각, 그리고 언어라는 사회적 도구를 총동원해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최근에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작가 토크를 진행했다. 한국의 미술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과 가깝게 교류해 왔는데, 한국의 미학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나?오: 방법론이 인상 깊었다. 오랜 리서치를 토대로 관심사를 충실하게 연구해서 작업으로 발전시키는 개념적인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토크에서는 미국 유학 후 한국에 돌아가서 현재까지 이어 온 작품 활동에 대해 얘기했는데 반응을 적극적으로 해줘서 재밌었다. 내 작업의 경우 장소 특정적 설치 방식을 취한다. 한가지 매체나 감각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이슈에 접근한다는 점을 특히 좋아해 준 것 같다.
▶ 왜 장소 특정형 미술인가?
오: 미국 대학원 유학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에서 살던 나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달랐다.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식하는 방법도 달랐다. 분명 같은 나지만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의 변화가 다시 나를 변화시켰고. 각각이 개별적 경험이었다기 보다는 동시적 경험이었다. 이 때를 계기로 장소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개인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된다고 보는가?
오: 정체성이라고 하면 보통 개인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내 작품은 사회적 차원에서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즉, 정치,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한다. 한 개인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예전에는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자신감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민을 거듭해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지만,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차이가 난다. 따라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개인의 문제로 국한해서 볼 게 아니라,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로 확장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전과 비교해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어떤 변화가 있나?
오: 한국 미술계에서는 90년대 처음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목소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했던 한국에서는 크게 대중화되지는 않고 굉장히 소수의 작가들만 활동했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동성애나 여성주의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보수적으로 보는 시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작품에서 보편적 주제로 다루기에는 어려움이 종종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계속 등장해 다양한 방식,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서 사회적 약자나 소수의 정체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는 노력을 한다. 7-80년대 한국에서는 아예 불가능했던 일이다. 큰 변화다. 변화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힘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니 킴 랑은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랐고 현재는 미국 델라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하며 겪은 디아스포라 경험을 토대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조각, 사진, 퍼포먼스를 통해 풀어낸다. 최근에는 밧줄이나 실을 이용해 조선시대 가체 등 다양한 매듭의 형태를 가진 작품들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무게나 질량과 같은 물질의 추상적 개념과 신체적 경험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유니 킴 랑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컴포트 헤어-엮어진 정체성 I” 사진 작품과 “컴포트 헤어” 조각을 선보이고 있다. “컴포트 헤어” 조각은 검은색 합성섬유로 만든 밧줄과 인조 머리카락을 꼬아 만들었다. 사람만한 밧줄을 땋은 것처럼 보이는 상당한 규모의 작업이다. 이 옆에 있는 사진 작품 “컴포트 헤어-엮어진 정체성 I”에서는 흰 옷을 입은 세명의 여인이 이 거대한 조각 작품을 머리에 쓰고 마치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 명의 여인은 각각 노년, 중년, 초년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컴포트 헤어”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머리에 썼던 가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부와 계급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미용품으로 쓰였다. 작가는 이 사치품을 이용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을 고발한다. 또한 규격화된 미의 기준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한다. 한껏 부풀려진 크기는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사회적 성역할과 고통의 무게를 대변하기도 한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에서는 작가가 직접 작품을 머리에 쓰고 하얀 플랫폼 위에 누워 있는 퍼포먼스 작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성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고스란히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편, 매듭을 통해 서로 포개어지고 엮인 머리카락의 모습은 한 문화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수천, 수만 개의 머리카락이 꼬이고 비틀어져 매듭이 만들어지듯이 문화적 정체성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상호적 관계 맺음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가장 한국인이라고 느끼나?
랑: 세 살 때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녔다. 대학교부터는 미국에 와서 살고 있다.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한국적이다. 외국에 살면서 다른 인종,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자랐다. 나와 다른 점을 인지할 때마다 한국 문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나를 한국인으로 만드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했다. 밖에 나와서 살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적인 것에 더 집중하게 된 것 같다. 내 나라, 내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특징을 살피게 된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국 사람들과 생활하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랑: 작게는 손의 제스처나 몸짓, 추임새가 유달리 한국적인 것들이 있다. 동의할 때 박수를 친다든지 마지막 글자를 길게 늘려서 발음한다든지 말이다. 정서적으로는 ‘정’이란 감정이 특별하다. 미국 지하철에서 노인 분들을 보면 바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때도 있다. 한국에서 자라지도 않았는데 한국인들이 할 법한 생각이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할 때가 있다.
▶ 재외동포로서 겪는 어려움은 무엇이 있나?
랑: 끊임없이 뿌리를 찾고 소속을 찾는 고달픔이 있다. 어딘가 중간에 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전시 오프닝 때 만난 여성이 인상깊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분이었는데 내가 말하는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무엇인지 공감한다고 해줬다. 한국은 대세를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소속 집단의 규범에 순응하지 않거나 다른 길을 모색하면 소외되기 쉽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들이 말하는 대세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다. 이때 나의 문화적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내 안에는 부모님께 배운 한국, 내가 자라면서 겪은 한국의 문화, 내가 맺은 수천 개의 인간 관계들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나만의 개인적 경험이 섞여 나라는 사람을 특별하게 만든다.
▶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랑: 집단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나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의 정체성 확립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들여다 보고 싶다. 외부인인 동시에 내부인의 시선으로 현재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대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우리 모두가 한국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두 작가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정체성은 유동적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각자 사회 집단의 일원으로 개인의 삶을 영유한다. 집단 안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가치와 상호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종 이 둘의 관계를 계급적 관계로 바라본다.
개인에게 집단의 정체성을 강요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는 성, 인종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차별과 억압을 가할 때 문화는 몰락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세계인들이 한국 문화에 주목하는 이 때 사회 비주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통해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이룩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