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전 지금도 호기심 먹고 살아요"

54년차 개그맨 전유성 인터뷰

꿀잠 자는 음악회 열면 어떨까?
명함에 새해 다짐도 적어 넣으면?
유명인 생가, 산후조리원 만들면?

'개그콘서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
당연한 것에 물음표 붙이는 습관 덕에
PC통신시대 베스트셀러 작가 등극

"새로운 생각 끊임없이 하는 이유?
심심하지 않으려고!"

그 엉뚱하고도 창의적인 생각들
산문집 에 담아
최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난 전유성에게 “어떻게 이렇게 새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하느냐”고 묻자 “심심하지 않으려고! 심심하게 살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최혁 기자
“클래식 음악만 들으면 잠드는 사람들을 위해 아예 꿀잠 자도 되는 음악회를 열면 어떨까?”

“명함에 이름과 회사 직함 외에 새해 다짐도 적으면 어떨까? ‘올해는 뱃살을 줄여보겠습니다’란 식으로.”“전국 각지에 방치된 유명인 생가를 잘 꾸며 ‘명당’ 산후조리원으로 활용하면 인기 있지 않을까?”

54년차 개그맨 전유성(74)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은 이런 아이디어들로 가득하다. 최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난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 새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하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심심하지 않으려고! 심심하게 살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

전유성은 1세대 개그맨이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면 개그맨은 그가 가진 여러 직업 중 하나일 뿐이다. 전유성은 수많은 사람의 ‘멘토’인 동시에 성공한 공연 기획자이기도 하다.대한민국에서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도 그였고, 심야 볼링장과 심야 극장 아이디어를 국내에서 처음 내고 현실화한 것도 그다. PC통신 시대가 막 열렸을 때 <인터넷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등의 책을 쓴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얼리어답터였다.

배우 한채영, 개그우먼 이영자와 김신영의 가능성을 처음 알아차린 것도 전유성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즐기는 ‘개나 소나 콘서트’를 만들었고, ‘지방 관객들에게 개그를 배달한다’는 콘셉트로 경북 청도군에 ‘코미디 철가방 극장’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영웅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운을 뗐더니 손사래를 친다. “그런 얘기들은 충분히 많이 했어요. 나는 요즘 앉은 자리에서 ‘옛날에’ ‘왕년에’를 세 번 이상 하는 사람은 안 만나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요.”내년이면 데뷔 55주년을 맞는 베테랑 개그맨이지만, 그는 늘 새로운 하루를 찾아 헤맨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 하장이란 곳을 오토바이를 타고 쭉 돌았어요. 그거 정말 신나더라고요.” 그는 “여행 뒤로 자꾸만 스쿠터를 사고 싶다”며 입맛을 다셨다.

책에는 이렇게 적었다. “생각해 보면 호기심은 나를 살게 한 힘이다. 남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이 즐겁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어슬렁거린다. 마치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 밖에서도 살아보고 싶다”며 청도군에서 공연장을 운영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지리산 자락, 남원 인월면 중군리에 머물고 있다. 그가 자리 잡는 곳마다 그를 찾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걸어 다니는 지역문화 콘텐츠인 셈이다. 그는 공연을 기획하는 것 외에도 지역 소상공인들의 마케터 역할을 자처한다. 근사한 소나무밭 근처 이웃집에 넌지시 “카페 하면 잘 될 것 같다”고 권해 지역 명소가 되도록 했다.“지방에서 먹고 사는 건 참 힘든 일이에요. 특히 젊은이들이 고생을 많이 해요.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죠.”

그는 중군리에서 ‘국수교과서’라는 국숫집을 하고 있지만 홍보는커녕 “겨울철에는 눈길을 뚫고 오는 손님이 없어 가게를 닫으니 국숫집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출판사 허클베리북스의 반기훈 대표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빛나는 홍보 카피를 척척 선물하면서 본인 책 출간 소식은 소셜미디어에 ‘제 책 광고.’ 이렇게 딱 한 줄 올리셨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인생살이가 서투르다고 고백하는 전유성은 스스로를 음치도 몸치도 아닌 ‘삶치’라고 했다. 메모는 그가 삶에 적응하는 방법이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힘이다. 그는 “쓸 만한 생각이 떠오르면 식당 냅킨이나 어디에든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정신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소문난 다독가인 그는 책을 읽을 때도 메모를 잊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책 속 ‘모처럼’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이 단어는 어디서 시작됐을까’란 호기심이 갑자기 일었다. “나름 곰곰 생각해봤는데, 아마 이게 윷놀이에서 온 것 같아요. 도개걸윷모…. 모는 흔치 않으니까 모만큼 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뙤약볕’이라는 단어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했다.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나는 구라까미 하루키니까.” 이어지는 그의 ‘아재 개그’에 속절없이 웃음이 터졌다. 호기심이 끊이지 않는 그인데, 그가 옷 소매를 걷자 팔뚝에 아이러니컬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You don’t need to know everything).”

전유성을 수식하는 또 다른 말은 ‘개그콘서트의 아버지’다. 초창기 KBS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라서다. 지상파 채널에서 공개 코미디가 차츰 사라지고, 공채 개그맨 선발도 뜸한 요즘이다. ‘개그의 위기’에 대해 조언을 청하자 그는 “사람이 있는 한 웃음은 안 없어진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오히려 개그를 선보일 여건이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유튜브 같은 새로운 채널도 많아지고, ‘우미관극장’처럼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이는 공간도 생기고요. 과거에는 한국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불모지라고 했거든요. 요즘 애들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하는지 몰라요.”

개그맨이 썼다고 그의 책이 마냥 웃기기만 한 건 아니다. 본인은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 웃긴 말을 툭툭 뱉는 특유의 개그 스타일처럼, 담백하고 진솔한 문장들로 순식간에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이런 식이다. 그는 화환을 보낼 때 뻔한 문구는 적지 않는다고 썼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조화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신에 이런 문구를 적어 보냈다. ‘너네 어머니 오이지 참 맛있었는데’. 제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영철아, 내가 옆에 있었으면 네 손을 꼭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문구를 전했다.
노희성 화백의 일러스트.
책에는 40년 넘게 시사만화와 만평, 캐리커처 등을 그려온 노희성 화백의 일러스트가 더해져 글 읽는 맛을 살린다.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전유성은 내년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현하느라 “바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벌써부터 폐광 지역 퇴직 광부들을 위한 콘서트, 한국 제1호 프로 마술사 이흥선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 등을 기획 중이다. 신간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또 다른 책도 쓰고 있다고 했다.“다음 책이 진짜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그의 말에 출판사 대표는 또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