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남편"…'주식 쪽박' 뒤 집 쫓겨난 증권맨의 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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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를 그린 순수의 거장"
"사고만 친 무책임한 가장"
엇갈리는 평가
폴 고갱의 두 얼굴

그 남자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자식을 5명이나 둔 가장이면서도,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무책임하게 “그림을 그리겠다”며 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요. 그의 이기적인 언행과 허세는 늘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예술가는 그 남자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남자의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태평양의 머나먼 섬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바닷바람을 타고 여전히 들려왔습니다. 어린 원주민 소녀들과 아이를 만든 걸 비롯해 현지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렸거든요. 결국 그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외롭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 사람, 폴 고갱은 위대한 화가라고. 때 묻지 않은 인간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숭고한 인물이라고. 그리고 이런 평가는 고갱이 죽은 후 대세가 됐습니다. 확실히 그의 그림에는 그전에 있던 어떤 미술과도 다른 아름다움, 누가 봐도 곧바로 고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색이 있었습니다. 이런 고갱의 작품은 피카소와 마티스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의 거장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이기적이고 냉담하고 무책임한 가장. 그러면서도 인류의 순수와 원시의 세계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헌신한 예술가. 오늘은 이 두 극단적인 평가를 오가는 모순적인 인물, 폴 고갱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건실한 남편에서 ‘식충이 불청객’ 되다
고갱은 평생 두 개의 전장(戰場)에서 싸웠습니다. 하나는 탁월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려는 싸움이었습니다. 예술적 싸움에서 고갱은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가장이 되려는 싸움에서 그는 형편없이 패배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성격 탓이었습니다.고갱의 성격이 처음부터 그 모양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돈 잘 버는 건실한 청년이자 훌륭한 가장이었거든요.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났고, 18살 때부터 5년 동안 상선과 해군에서 배를 탄 뒤 23살의 나이로 파리의 한 증권거래소에 취업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881년 거품 붕괴로 파리 증시가 무너지면서 고갱의 삶도 무너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는 직장을 잃었고, 갖고 있던 주식도 휴지 조각이 됐습니다. 전업 작가가 돼볼까도 생각했지만 미술시장도 형편없이 쪼그라든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 어쩔 수 없이 고갱은 덴마크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 처가살이를 시작합니다.
태평양 섬에 다녀오다
그렇게 파리로 돌아온 고갱. 위대한 화가가 돼 보겠다며, 그래서 처가 식구들의 콧대를 꺾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겠다며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불황 탓에 고갱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푼돈을 받고 전단지를 붙여야 하는 나날. 그러면서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날들. 고갱은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그림, 충격적인 그림을 그려야 해. 그게 내가 살 길이다.”문제는 목적지. 파리에서 너무 멀고 외딴곳은 일단 제외해야 했습니다. 식사와 그림 재료를 준비하기도 어려운 데다 고갱이라는 이름이 아예 잊힐 수도 있으니까요. 파리와 적당히 멀면서도 적당히 가깝고, 직접 가기는 어렵지만 연락은 어찌어찌 닿을 수 있는 장소. 그런 계산 끝에 고른 건 중부 아메리카의 파나마와 마르티니크 섬이었습니다. 어차피 계속 파리에 있어 봤자 되는 일도 없겠다, 서른아홉 살의 고갱은 계획도 없이 그야말로 훌쩍 떠났습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열대 지방의 풍경이 고갱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고갱의 실력이 무르익을 때가 돼서였는지, 둘 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시기부터 특유의 독창적인 그림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겁니다. 덕분에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그럭저럭 호평받고 그림도 약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바꾸고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요.
프랑스, 고흐, 그리고 다시 타히티로
여전히 앞길이 막막했던 마흔의 고갱 앞에 나타난 건 네덜란드 출신의 형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이자 갤러리스트인 테오 반 고흐였습니다. 빈센트는 고갱을 동경한다며 “같이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고갱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같이 살면 집세를 아낄 수 있는 데다,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가 자신의 그림을 사주고 자금을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훗날 이 사건에 대한 고갱의 평가는 그의 성격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덧씌웠습니다. 고갱은 고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야. 그의 고통이 마침내 끝났구먼.” 나중에 고흐의 추모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도 그는 이렇게 냉혹하게 얘기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는 얘기가 퍼지면, 우리 화가들 모두에게 안 좋을 수도 있네.”
한때 같이 살았던 동료에 대해 고갱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했던 건, 고흐의 최후와 자신을 겹쳐 봤기 때문일 겁니다. 두 화가는 그 누구보다 서로 닮아있었거든요. 예술의 본질에 집착하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래서 고갱에게는, 미쳐버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반 고흐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다시 섬, 그리고 최후
하지만 이런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고갱은 독보적인 예술을 쌓아 올렸습니다. 고갱 자신이 착각했던 것처럼, 타히티의 환경과 주민들 덕분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타히티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배우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고갱이 캔버스에 그린 아름다운 주민들과 풍경, 분위기는 반쯤만 진실이었을 뿐 나머지는 고갱의 상상이자 창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당시 실제 타히티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이후 고갱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는 섬을 옮기기도 했고, 아이도 더 태어났고요. 다만 레파토리는 거의 비슷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자신이 보낸 그림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프랑스 평론가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어린 원주민 여성과 동거하고, 쓸데없는 것에 피해의식을 갖고 분노하고, 말썽을 일으키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그런 삶을 반복하기를 10여년, 고갱은 지병이 악화돼 1903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고갱이 죽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져있던 고갱의 작품이 회고전을 계기로 모였다는 점, 미술계의 유행 등 여러 상황이 겹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하나였던 서머싯 몸이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소설 <달과 6펜스>를 펴내면서 고갱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고갱은 예술에 모든 걸 바친 위대하고 숭고한 거장이 됐습니다.
확실히 고갱의 개인적인 삶에는 흠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갱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인성과 별개로 작품성만큼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 아래 그림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그림 속에서는 오른쪽 아래 갓난아이에서부터 왼쪽 아래 과거를 후회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노인까지 인생의 모든 국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왼쪽 뒤의 저승사자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갱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은 그 자체가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그러니 삶의 모든 것을 그리자.
고갱의 삶은 실제로 모순투성이였습니다. 고갱은 유럽, 타히티, 자신이 살았던 섬 그 어디에도 진정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족이 되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문명으로의 탈출을 간절히 바랐으나 누구보다도 문명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순박한 원주민들을 원한다면서도 그들의 말을 배우지 않았고 진정으로 섞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시의 자연을 원하면서도 실제 자연이 아닌 자신이 창조한 자연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순 속에서 방황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갔던 건, 꿈을 꿨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놓친 길들 사이 어딘가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는 항상 놓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이 그 증거입니다. 작품 속 곳곳에는 슬픔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으며 끝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거대한 순환 과정이 주제입니다.
삶은 모순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지만, 이는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희망에 관한 그림입니다. 끝이 있기에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고, 이는 곧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뜻하는 것이므로.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희망찬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이번 기사는 'Paul Gauguin'(David Sweetman 지음)을 중심으로 '폴 고갱'(인고 발터 지음, 김주원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Gauguin Tahiti'(Paul Gauguin 지음, George Shackelford와 Claire Frèches-Thory 기여), 뉴욕타임스 기사 'Is It Time Gauguin Got Canceled?'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