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동 칼럼] 구멍 숭숭 뚫린 채 선진국일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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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 명목GDP 세계 13위윤석열 정부의 국정 지지율이 높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야당의 공세는 아무래도 지나치다.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긴 했지만 경제가 폭망한 것도 아니고,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는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분식점 메뉴인 라면과 김밥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한때 ‘블랙 페이퍼’라며 백안시했던 김 수출액이 1조원을 돌파한 상황이다.
경제지표로는 분명 선진국
저출산 자살률 노인빈곤율 …
달갑잖은 세계 1등 기록들
정부 정책만으론 바꾸기 힘들어
각자 노력 받쳐줘야 선진국 가능
서화동 논설위원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유엔 산하 정부간기구인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1년 7월 한국의 지위를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변경했다. 1964년 가입 이후 내내 그룹 A에 속했다가 57년 만에 국제사회로부터 선진국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경제지표를 보면 선진국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 국가 경제 규모가 2020년 세계 10위, 2022년에는 13위였다. 글로벌 강달러로 인한 원화가치 하락과 성장 부진 등이 겹쳐 순위가 다소 내려갔지만 전후 분단국이 이 작은 땅에서 이만한 인구로 이뤄낸 성과로는 대단하지 않은가.하지만 다른 지표들을 보면 선진국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해진다. 국가가 안정적·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사회·정치·문화·환경·교육·안전 등 다방면의 발전이 요구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달갑잖은 1등 기록들이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OECD 1위’를 쳐보면 좋은 1등, 자랑스러운 1등보다 부끄럽고 민망한 1등이 훨씬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평균의 2배를 훨씬 넘는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25.2명)을 비롯해 노인빈곤율(40.4%), OECD 평균의 3배에 가까운 남녀 임금 격차(31.1%), 행복지수, 가계부채 증가율, 미세먼지 농도, 사교육비 지출률과 자녀 양육비, 낙태율, 직장인 출퇴근 시간 등등. OECD 국가 중 여덟 번째로 높은 재난사고 사망률(인구 10만 명당 0.21명)도 우울한 성적이다. 각종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숱한 인명 피해를 겪고도 좀체 나아지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노동생산성도 하위권(33위)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지수는 꼴찌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극단적인 저출산·고령화다. 연도별·분기별로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합계출산율은 2022년 0.78명, 지난해 0.72명에 이어 올해 0.6명대로 떨어질 것이 확실시된다. 당연히 OECD 꼴찌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22~2072년 장래인구추계’는 향후 한국이 연령 구성, 부양비, 출산율, 기대수명, 인구성장률 등 모든 부문에서 1등과 꼴찌를 번갈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2072년의 기대수명은 세계 최장(91.1세)이고,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47.7%에 달해 OECD 1위를 차지할 거라고 한다. 반면 15~64세 생산연령인구 비중은 45.8%로 뚝 떨어져 100명당 부양인구가 104.2명으로 뛰어오를 거라는 전망이다. 이 역시 걱정스러운 1등이다.
새해에는 덕담과 각오가 쏟아진다. 대통령부터 각 부처 장관까지 경제를 살리고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국가가 어버이처럼 모든 걸 해줄 순 없다. 저출산만 해도 정부가 온갖 대책을 세우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지만 문제를 단박에 풀 묘책은 없다. 살기 힘들어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겠다는데 어쩌랴. 소를 물가에 데려갈 순 있어도 물을 떠먹일 방법은 없다고 하지 않나.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삶의 조건을 개선해주는 것일 뿐, 문제 해결의 주체는 청년세대다. 지금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50년 뒤 자신들을 부양할 청년세대가 절대 부족하게 된다. 자업자득인데 그때 가서 누구를 탓할 것인가.
다른 문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정부대로 노력해야 하지만 개인들의 노력이 줄탁동시(啄同時)처럼 받쳐주지 않으면 정책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천하가 흥하거나 망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지금의 부끄러운 1등 기록을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바꿔놓지 못한다면 선진국 국민이 되는 날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선진국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청룡이 비상하는 새해 아침에 덕담만 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