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붓터치로 그려낸 원초적 욕구의 충돌···영화 ‘립세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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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빈센트' 부부 감독의 유화 애니메이션 신작폴란드 부부 감독인 DK(도로타 코비엘라) 웰치맨과 휴 웰치맨이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2017년 작 ‘러빙 빈센트’는 독특한 애니메이션 기법과 높은 완성도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빈센트 반 고흐 사후 1년 뒤에 그의 마지막 삶과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쫓는 이 영화는 수동적이고 노동집약적인 로토스코프(촬영한 동영상의 이미지를 한 프레임씩 베껴 그리는 장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노벨문학상 받은 폴란드 작가 농촌소설 영화화
먼저 실제 장소에서 배우들의 연기로 실사 동영상을 찍은 후 이 영상을 바탕으로 107명의 아티스트가 6만2450여 점의 유화 프레임을 그렸고, 이를 두 감독이 편집해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선보였다. 인물의 표정과 동작은 대부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은 고흐의 잘 알려진 명작과 그림체를 연상시키는 장면들로 채웠다. 이로 인해 극의 몰입도는 실사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고. 참신성과 예술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에서 40여 개의 상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오는 10일 개봉하는 ‘립세의 사계’는 두 감독이 ‘러빙 빈센트’ 이후 약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작의 고흐처럼 렘브란트나 피카소 등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유명 화가의 극적인 삶과 예술세계를 담은 영화를 웰치맨 부부의 차기작으로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전작처럼 실제로 촬영한 동영상을 바탕으로 일일이 유화 프레임을 그리고 디지털 기술을 입혀 완성하는 ’유화 애니메이션‘은 맞지만, 주제나 소재는 딴판이다.
영화의 원작은 19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가 쓴 4부작 소설 ’농부들(Chlopi, the Peasants)’이다. 레이몬트가 폴란드의 작은 농촌 마을 립세에서 1년간 벌어지는 이야기를 ‘봄’‘여름’‘가을’‘겨울’이란 사계(四季)의 부제를 붙여 1904년부터 1909년까지 5년에 걸쳐 나눠 펴낸 1000페이지 분량의 대하소설을 두 감독이 러닝타임 115분 분량의 영화 시나리오로 축약해 각색했다.영화의 원제이자 원작 소설 제목의 뜻은 ‘소작농들’에 가깝다. 립세의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들이다.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말. 주인공은 여전히 억압적인 가부장제와 봉건주의 관습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소작농 소녀 야그나다. 어머니의 강요로 갓 홀아비가 된 마을 최고의 부농 보리나와 팔려가다시피 결혼하고, 몸과 마음을 줬던 보리나의 아들 안텍에게도 결국 배신당하는 비극적 운명을 그린다.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야그나를 일종의 페미니스트처럼 당당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앞으로는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여성으로 그리는 마지막 장면이 뭉클하긴 하다. 하지만 극 초반에 “인생엔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며 자유를 꿈꾸는 등 진취적인 모습을 잠깐 보였다가 극 중 내내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만 보였던 야그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치 전사처럼 변신하는 모습에 선뜻 공감하기는 힘든 결말이다.플롯만 보면 사실주의 경향의 근대 소설을 극화한, 철 지난 옛날 문예영화를 보는 듯하다. 립세라는 마을을 둘러싼 자연이 계절이 바뀜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애니메이션 장면들과 때때로 등장하는 섬세하고도 거친 유화의 붓터치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임에도, 인물들의 모습과 동작뿐 아니라 대부분의 마을이나 자연 묘사도 사실적이어서 ‘현실 세계’의 원본 영상을 상상하게 한다.두 감독은 영화의 시각적인 방향성과 일치하는 화가 30인의 유화 명작들을 작품 속에 부활시켜 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림은 유제프 헤우몬스키(1849~1914)의 ‘인디언 서머’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약한 폴란드 화가들의 그림들이어서 이 분야에 정통하지 않다면 알아보기 힘들다.대중적으로 알아볼 만한 명작은 폴란드인이 아닌 화가의 그림인 밀레의 ‘이삭줍기’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뿐이다. 그나마 순식간에 지나가고 극 전개상 중요한 장면도 아니어서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러빙 빈센트’에서 살아 움직이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플롯과 캐릭터에 딱 달라붙는 환상적인 그림 배경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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