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은행의 사회적 책임과 전세사기 예방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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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삶 무너뜨린 전세사기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끝없이 추락하는 정치는 길을 잃었고, 정부의 다양한 지원이 쏟아져나오지만 민생은 여전히 팍팍하다. 새해에는 우리 국민 모두의 삶에 훈훈한 온기가 퍼지기를 기원해본다.
보호장치 부족해 일어난 재난
임차인은 예금, 임대인에겐 대출
은행이 전세계약 중개役 맡으면
사회적 책임도 다 할 수 있어
김준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대외 여건 악화와 물가 안정을 위해 불가피했던 ‘통화 긴축’이라는 거시경제 충격이 민생을 어렵게 한 주요 원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기순환적 거시경제 회복만으로 지속적인 민생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 민생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가능할 것이다. 민생 회복을 위한 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은행의 사회적 책임 강화와 취약계층을 상대로 한 전세사기 예방을 연결해 보면 어떨까.막대한 규모의 가계대출과 가파른 금리 인상 덕에 국내 은행권의 2023년 누적 이자 수익은 3분기까지 44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은행이 어려운 민생을 도외시하고 사회적 책임을 회피했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
한편 2023년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자의 대부분은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인 청년이었다. 사회 경험이 일천한 청년들의 삶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전세계약은 기본적으로 (소득 대비) 고액의 고위험 사금융 거래다. 전세금 지급은 임차인이 직접 임대인에게 거액의 장기 무담보 신용대출을 하는 것과 같다. 금융 전문가의 눈에는 무모한 대출이다. 전세사기는 전세계약 당사자 간에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고 임차인이 금융 위험을 진다는 점을 노린다. 정보 비대칭성은 임차인이 전세금을 적시에 온전하게 회수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등기부 열람, 전세확정일자 등록, 전세보증보험 가입 등 다양한 임차인 보호 장치가 있지만 취약계층은 정보 부족이나 금전적 이유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세보증보험도 가입 조건이 까다롭거나 보험금 수령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허다해 보호장치로서 부족한 점투성이다.취약계층을 보호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을까. 사금융의 영역에 있는 전세계약을 제도권 금융으로 유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2년 만기 전세계약을 가정하면, 임차인은 전세자금을 은행에 2년 만기 무이자 정기예금으로 예치하고 은행은 정기예금을 재원으로 임대인에게 2년 만기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임차인은 전세계약 만료 시 언제라도 예금을 인출할 수 있으므로 손실 위험이 없다. 반면 임대인이 은행 대출금 상환을 지체하거나 못할 경우 발생하는 손실은 온전히 은행의 몫이다. 남은 문제는 은행이 감수하는 손실 위험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다. 적절한 보상 없이는 은행이 참여할 유인이 없어진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해결이 가능해 보인다.
첫째, 은행은 축적된 신용평가 역량을 활용해 정보 비대칭성을 축소하고 필요시 임대인에게 신용대출이 아니라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세사기 가능성과 대출 부실화 위험 자체를 축소할 수 있다.둘째, 은행의 위험 감수로 혜택을 보는 임차인(임대사업자의 경우 임대인 포함)에게 소정의 수수료를 부과해 위험관리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보험사에 비해 자산 규모가 큰 은행들이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위험을 효과적으로 통합(risk pooling)한다면 현재의 전세보증 보험료 이하로 수수료를 책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사회적 책임 강화 차원에서 은행이 자율적으로 서민이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수수료를 면제하거나 차등화해 수수료 부담을 추가로 줄여주는 것도 가능하다.
이 제도가 시행되더라도 거시건전성을 위협하는 가계부채의 전체 규모는 변화가 없다. 다만 사인 간 부채가 줄고 은행의 가계대출이 늘어나는 형태로 가계부채 구성이 바뀐다.
역대 최대 이익을 낸 은행권이 소상공인과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2조원 규모의 상생기금 지원을 약속했다. 민생 회복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시적 지원보다는 은행이 잘할 수 있는 가계대출 업무를 통해 상시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금융당국도 진지한 고민과 함께 필요한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