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뛰쳐나가길 꿈꾸는 '노라'들을 위해, 연극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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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이 발표된지 140년이 지난 2019년,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쓴 희곡 '와이프'도 어딘가를 뛰쳐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다만 이 작품엔 집이 아닌 벽장 밖으로 뛰어나온 게이와 레즈비언이 등장한다.(성소수자가 본인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통상 '벽장 밖으로 나온다'고 표현한다.)연극 '와이프'엔 1959년부터 1988년, 2024년, 2046년 등 4개의 시대에 걸쳐 '인형의 집'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나타난다. 1959년엔 '인형의 집'이 끝나고 노라를 연기한 배우 수잔나의 대기실에 데이지·로버트 부부가 찾아오는데, 수잔나와 데이지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이후의 시대에도 '인형의 집' 무대가 끝난 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성소수자 커플이 등장해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연극이다. 무대 위 거울을 통해 배우의 표정을 보게 하는 연출과 강렬한 색감의 조명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이 작품 속 흐르는 시대 속에서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걸 보는 것도 흥미롭다. 가령 1959년에 데이지의 가부장적인 남편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다음 막인 1988년에선 본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싸움닭 게이' 아이바로 변신한다. 시대 전환의 속도가 빠르고 각각의 시대마다 기승전결의 서사를 갖춰 약 1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금방 지나간다.연극 장르에 대한 애정도 담겨 있다. 전세계 무대에 수없이 오르며 고전이 된 연극 '인형의 집'이 시대별로 어떻게 다시 창조되는지를 바라보는 것도 재밌다. 얼굴에 일종의 스타킹을 뒤집어 쓴 형태로 몸부림치면서 노라의 탈출을 표현하거나, 노라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는 등 시대가 지날수록 다소 난해하고 파격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장르에 대한 자아비판과 고민 등이 엿보인다.
자신만의 옳음을 지켜내는 노라를 찾고 싶은 이들, 혹은 스스로가 노라이고 싶은 이들에게 바치는 연극. '인형의 집'을 미리 읽고 오면 극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공연은 2월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