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에는 창덕궁 담장이....바람과 햇살이 채우는 '차경'의 공간
입력
수정
[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그는 공간의 모든 요소가 같은 말을 하길 바랐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간은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미서기문을 밀어내는 힘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적당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그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일이 또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딱 그만큼의 힘을 찾아 문의 무게를 정했고, 자석의 힘을 빌려 리듬감을 더했다. 공간의 문을 여는 행위는 그곳을 찾은 이가 가장 먼저 겪는 소리 없는 인사나 다름없다. 그가 결정한 출입문의 무게는 조금 엄격했지만, 그만한 정중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원서동 일대는 모든 건물이 궁궐의 담장을 따라 낮게 지어졌다. 그러니 어디에서도 담장보다 높게 솟은 나무줄기가 보였다. 바람을 타고 후원의 나무가 소리를 전하니, 아파트 숲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골목길 도처에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도 이 고요한 아름다움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를 마주 본 쪽으로 프레임이 없는 미닫이창을 만들었다. 창밖으로는 궁궐의 빨래터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고, 담장을 따라 지어진 한옥의 낮은 지붕이 보인다. 그 지붕 위로는 때때로 낙엽과 눈이 쌓이고, 녹음이 어우러지며, 빗방울이 부딪혀 계절의 빛과 소리를 전달한다. 출입구와 창이 있는 맞은편의 두 벽은 다른 방식으로 바깥의 풍경을 이어 담았다. 겉으로 본드나 실리콘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얇은 목재를 격자무늬로 엮어 붙였다. 천장에 붙은 냉방기에도 비슷한 격자무늬의 틀을 덮어두었는데, 이 무늬들은 창밖에 보이는 궁궐 담장의 무늬와 같다. 공간의 요소가 안과 밖을 연결해 주니, 4평 남짓의 공간은 가장 너른 공간이 됐다. 이 격자무늬 벽은 수납장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격자의 너비와 높이를 원두를 소분해 놓은 샬레와 원두 패키지를 두기에 알맞은 크기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가 매일 가지고 다니는 가방과 외투, 비 올 때 챙기는 우산은 모나지 않게 튀어나온 세 개의 원목 걸개에 걸려있다. 그리고 바 위에는 언제나 같은 위치에 커피 추출 도구가 놓여있다. 이렇게 공간 안의 모든 요소는 정중하고 고요하며 아름답기를 바란다.담장 너머 궁궐의 한옥은 겉으로는 우람해 보이나 추녀와 공포로 꾸며져 있어 보기보다 실내 공간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기둥 없이 넓은 공간을 그대로 활용하는 현대 건축물과 달리 실내 공간을 꾸미는 일에 제약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옥은 무작정 공간을 넓히기보다 주변 환경과의 어우러짐을 선택했다. 들어열개문(사분합문)이나 미닫이문으로 계절에 따라 공간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옥의 문과 창문은 사람이 들고 나는 공간이자, 집과 자연이 공존하는 통로로써 존재했다. 바람과 햇살이,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이 바람을 타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니 더 넓고 높게 건물을 짓는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치를 빌려온다는 뜻의 ‘차경’은 한옥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커피도 자연의 것을 빌려서 그 맛과 향을 완성한다. 또 그것이 우리에게 닿기까지는 커피를 기르고 수확하며, 가공하고 운반하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커피 본연의 맛과 향에 주목하는 스페셜티커피 시대에는 이 모든 섭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커피 맛에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티엑스티(.txt)의 이수환 대표는 공간을 꾸려나가는 일과 커피를 만드는 일 모두 자신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했다. 그래서 티엑스티는 차경의 공간이자 차음의 공간이고 또 차미의 공간이 됐다.
이 대표는 이왕 빌려오는 자연의 맛이라면 가장 최상의 것을 준비해야겠다 생각했다. 잘 가꿔낸 커피의 맛을 정중하게 설명하고 추출하는 일은 그가 생각하는 공간의 완성이기도 했다. 티엑스티는 정갈하게 갈아둔 연필로 주문서를 작성할 수 있게 했다. 주문서에는 그날에 준비된 커피가 나열돼 있거나, 몇 가지 키워드로 자신이 원하는 커피를 찾을 수 있는 질문을 써놓았다. 혹자는 이 방식이 침묵을 유도한 것인지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주문서를 작성한 끝에는 취향에 대한 깊은 대화가 이어지곤 한다. 그렇게 주문이 완성되면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주전자를 들고 커피를 내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좋아 골랐다는 도기 드리퍼와 서버의 소리가 마지막으로 공간을 채운다. 문을 열 때의 그 정중한 인사는, 그렇게 완성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켤 때 비로소 완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