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청약이 낫겠다"…심란해진 재건축 단지 집주인들 [돈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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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 드라이브"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재건축 추진 기대감이 커졌잖아요. 막상 사업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주변에선 돈만 더 내야 한다는 얘기만 들리고요. 팔아야 하나 고민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조합원들, 늘어난 비용부담에 '무조건 환영' 어려워
"'자금 조달' 문제가 사업 속도 가늠할 듯"
정부가 재건축, 재개발 등 도시정비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재건축 단지를 소유한 집주인이나 투자자들의 고민은 커집니다. 이들이 고민하는 까닭은 '돈' 때문입니다. 치솟는 물가와 높은 금리 등으로 커진 자금 부담이 모두 이들에게 돌아와서입니다.5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발표한 신년사에서 "재건축·재개발 사업절차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사업 속도를 높이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21일 모아타운 현장에서도 규제 완화 뜻을 밝혔는데, 약 열흘 만에 또 규제 완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따라 국토교통부는 재개발·재건축 절차 합리화, 규제 완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이를 구체화한 방안을 이달 중 발표할 계획입니다. 재건축 단지의 노후도와 안전성 등을 따지는 안전진단 완화, 재개발 주민 동의율을 낮추는 방안 등이 담길 예정입니다.
분당·일산·중동·평촌·산본 등 1기 신도시를 비롯한 노후계획도시 특별법도 국회 문턱을 넘었습니다. 법은 오는 4월 27일 시행될 예정입니다. 법안엔 단순한 점 단위 재건축이 아닌 도시 단위 정비를 통해 노후화한 계획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자족 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깁니다.전문가들은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도시정비사업과 관련한 규제가 완화하면서 사업엔 분명히 긍정적"이라고 말했습니다.그렇다면 사업의 실제 당사자들인 조합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이런저런 발표 이후로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하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한 단지 조합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할 때만 해도 재건축이 금방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나. 그만큼 기대가 컸다"며 "사업 속도는 여전하고 오히려 '돈을 몇억원은 더 내야 한다'는 얘기만 들린다"고 토로했습니다.또 다른 재건축 추진 단지 조합원도 "처음에는 '몸테크'(몸과 재테크의 합성어, 오래된 아파트를 매수해 어려운 환경에서 버티며 살면서 재건축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뜻)도 거뜬하겠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요즘엔 팔고 나가거나 차라리 청약으로 새 아파트를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한다. 정부는 도시정비사업과 관련해 원점에서 재검토한다고 하는데 몸으로 와 닿는 건 별로 없다"고 귀띔했습니다.
이처럼 조합원들이 '무조건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업추진에 늘어난 비용 때문입니다. 규제가 완화되면서 사업 환경이 나아진 것은 맞지만 자금 조달에 대한 부담이 불었습니다. 먼저 공사비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KICT)이 발표한 '2023년 11월 건설공사비지수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건설공사비 지수는 153.37로 잠정 집계됐습니다.
이 지수는 건설공사에 투입되는 재료, 노부, 장비 등 자원의 직접 공사비 가격 변동을 나타내는 통계입니다. 2020년 11월 120.2이던 지수는 2021년 11월 138.62, 2022년 11월 148.84, 2023년 11월 153.37로 올라 3년 만에 27.6% 치솟았습니다.임금도 빠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대한건설협회가 발표한 '2023년 건설업 임금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건설업 임금은 26만5516원으로 상반기 대비 3.95%, 전년 동기 대비 6.71% 상승했습니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재초환)도 문제입니다. 작년 말 재건축초과이익 부담금 면제 구간을 8000만원까지 늘리는 내용의 재초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물론 기존보다 금액 부담은 적어졌지만, 부담금 인하 효과를 극적으로 누리는 단지는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이 밖에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집값이 하락세로 돌아선 점, 금리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등 시장을 둘러싼 환경도 악화하면서 사업 속도는 탄력이 붙질 않는 상황입니다.
결국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조합원들이 얼마나 자금을 수월하게 낼 수 있는지에 달렸다는 설명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도정업계 한 관계자는 "조합과 시공사가 돈 때문에 갈등하는 일이 점점 늘고 있다며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공사비 갈등으로 사업 추진이 원활하지 않은 단지가 아주 많다. 조합원들이 얼마나 자금을 부담할 수 있는지가 사업 성패를 좌우하는 '키'가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 역시 "재건축이나 재개발 조합들과 얘기해 보면 공사비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곳들이 있다"며 "물론 공사비 상승도 부담이 되겠지만 시공사가 사업을 위해 빌린 자금도 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대출받은 금액에 대한 이자도 늘어나는 구조다. 이 역시 조합원들이 부담해야 할 분담금에 녹아든다. 결국 시간이 곧 돈이란 얘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