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절망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사랑

(128) 요시모토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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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24세 때인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카이엔 신인문학상과 이즈미 쿄카상을 받았으며,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25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체에 친밀감 있는 표현’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받으면서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키친>은 세 개의 단편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구성되었다. ‘만월’은 ‘키친’의 주인공들이 몇 달 후에 겪는 일을 그려 ‘키친’과 ‘만월’은 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부엌’인 사쿠라이 미카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결국 휴학 중인 미카게의 곁을 떠나고 만다. 부엌에서 절망하며 뒹굴뒹굴 자고 있을 때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한 살 아래 남자가 나타난다.

다나베 유이치가 아르바이트하던 꽃집에 할머니가 자주 들러 꽃을 사 갔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제안 앞에서 미카게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날부터 미카게는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와 함께 지낸다. 미카게는 6개월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들며 조금씩 슬픔을 이겨낸다.

인생이란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

유이치를 혼자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에리코는 미카게에게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아이든가, 화분이든가,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거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라며 식물에 물을 준다. “인생이란 정말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난 그나마 다행이었지”라고 말하며.

바에서 일을 마치고 잔뜩 취한 채 밤늦게 퇴근하는 에리코는 ‘키친’의 최대 반전 인물이다. 원래 유이치의 아버지이던 에리코는 아내가 암으로 죽자 아들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만월’ 첫 문장은 “가을의 끝, 에리코 씨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성형수술로 아름다워진 에리코를 스토커가 나이프로 살해한 것이다.

겨울이 되고 나서야 유이치는 미카게에게 간신히 엄마의 죽음을 알린다. 학교를 그만두고 요리 연구가의 어시스턴트가 된 미카게는 놀라서 허둥대다가 유이치를 찾아간다.유이치와 미카게는 함께 에리코가 남긴 유서를 읽는다. 유서에 “아아, 미카게를 내 집에 들인 것! 그땐 정말 즐거웠지. 어째 미카게를 만나고 싶구나. 그 애도 소중한 내 자식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성년자는 벗어났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두 사람, 나이가 얼마든 고아임을 실감하면 아픔이 밀려온다. 유명 요리 연구가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행복한 가정의 학원생들을 볼 때 미카게는 “하루하루, 내일이 오면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즐거움으로 가슴이 설레었다”라며 스스로를 달랜다. 아울러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라고 되뇐다.

연애란,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힘든 일

서로 좋아하면서도 깊은 슬픔에 눌려 선뜻 사랑을 결심하지 못할 때, 유이치를 좋아하는 오쿠노가 미카게 앞에 나타난다. “늘 그렇게 어중간한 형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 편리하겠죠. 그렇지만 연애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힘든 일이 아닐까요?”라고 힐난한다.미카게는 한밤중에 맛있는 돈가스를 사서 시름에 젖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유이치를 찾아간다. 그를 만나 “즐거웠던 시간의 빛나는 결정이, 기억 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우리를 떠밀었다”라고 읊조린다. 할머니와 유이치, 에리코와 자신을 잇는 우정과 사랑을 떠올리던 미카게는 “앞으로도,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근미 작가
<키친>은 서늘한 가슴을 서서히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삶의 저변에 깔려 있는 죽음과 맞닥뜨린 사람들 때문에 침울해졌다가, 힘겹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용기가 나기 시작한다. 삶이 향하는 곳이 죽음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아가는 게 인생길이다. <키친>은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