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먹방'의 꽃이 맥주가 아니라 '오이'라고?…군침 도는 소설 속 미식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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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신간"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속 사람들은 맥주를 왜 이렇게 '찔끔찔끔' 먹을까?"
'헨젤과 그레텔' 보며 입맛 다시던 소년
헤밍웨이, 루쉰 등 명작 속 음식 이야기 펴내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가 입에 달고 다닌 '절인 라임'은 무슨 맛일까?"
"<채식주의자> 주인공이 먹는 식물성 대체육이 널리 보급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용재 음식 평론가(사진)의 신간 <맛있는 소설>은 문학에 대한 군침 도는 질문들로 가득한 책이다. 지난 5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먹거리는 글을 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며 "소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음식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재 평론가는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건축평론가로 일하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귀국했다. 8년간의 타지 생활로 멀어졌던 한식을 다시 먹으러 다니며 '외부인의 시각'을 갖게 됐다는 그다. 솔직하고 '까칠한' 품평을 담은 에세이 <외식의 품격>(2013)은 지금껏 10쇄 넘게 증쇄된 스테디셀러다.
"문학은 나의 글쓰기의 기반"이라고 말한 이 평론가는 소설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책은 늘 풍족하게 사주시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며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을 보고 입맛을 다시고, 갓 잡은 참치회 맛을 상상하며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고 했다.
이번 신간도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은 <작은 아씨들>의 '절인 라임' 이야기로 시작한다. 네 자매 중 막내인 에이미가 학교에서 몰래 먹다가 꾸지람을 들었던 음식이다. 그는 "라임은 커녕 바나나조차 귀했던 시절, '매우 짜고 실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으로 책을 읽어나갔다"고 썼다. "이제 라임의 실체는 알게 됐지만, 또 다른 '어른의 집념'이 생겼습니다. '왜 에이미는 절인 라임을 먹었다고 학교에서 쫓겨났을까' 등 질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죠." <맛있는 소설>은 뷔페 같은 음식 안내서다. 동서양 고전부터 비교적 최근작까지 다양한 메뉴를 담았다. '하루키 작품 세계'를 다룬 3장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부터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2000)까지 17권의 단·중·장편을 아우른다. 7000쪽이 넘는 전체 소설 분량에서 음식이 언급된 구절만 936개다. "대부분 '하루키' 하면 맥주를 떠올리지만, 진미(眞味)는 '오이'에요. <노르웨이의 숲>에선 임종을 앞둔 미도리의 아버지가 아삭한 오이를 베어 물죠. 시들어가는 생명과 물오른 생명의 대조, 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 먹는 오이의 묘한 식감과 맛…. 단연 하루키 작품세계에서 가장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식자재입니다."
때로 음식은 작가의 메시지를 숨겨둔 장치가 된다. 지난해 영화로도 국내 개봉한 클레어 키건의 <말없는 소녀>가 그랬다. 친부모 밑에서 방치되다시피 자란 소녀가 친척 집에 맡겨지며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이야기다. 소녀가 친척 집에서 처음 식사하는 대목은 '빵에 버터가 부드럽게 발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평론가는 "키건은 음식을 통해 앞으로 소녀가 마주할 '부드러운' 일상에 관한 힌트를 줬다"고 설명했다. 14년 차 번역가로도 활동 중인 이 평론가는 소설 속 오역에 대해 날 선 비평도 쏟아냈다. 신간에서 그는 미국 작가 앨리스 워커의 <컬러 퍼플>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미국 남부의 가난한 흑인 소녀인 주인공이 졸지에 영국 부유층의 빵인 '스콘'을 먹게 됐다"고 썼다. 그는 "서로 다른 음식인 '비스킷'과 '스콘'을 혼동한 결과"라며 "비슷해 보이는 음식일수록 미세한 차이에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맛있는 소설> 속 일부 챕터들은 음식의 사회적 맥락까지 조명한다. 이 평론가가 "책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음식으로 세상 읽기'"라고 말한 이유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여성들이 차린 밥상을, <모비 딕>을 읽고는 포경 산업의 남획 문제를 연결한다.
"오늘날 한국 음식은 예전에 비해 단맛이 늘었습니다. 6·25 전쟁 등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침투한 '씁쓸한 시대상'의 그림자라고 생각해요. 단맛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그 대신 깊이가 얕고 금세 질린다는 특징이 있죠." 최근 사회적으로 화제 된 'K푸드'에 대해서도 걱정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한식당 11곳이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되는 등 한식에 대한 해외 소비자의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면서도 "이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소비자들은 일정 주기로 식문화를 유행처럼 소비해 왔고, 이번에 한식의 차례가 왔다고 봅니다. 금방 사라지는 유행으로 흐지부지되지 않기 위한 방안을 고민할 때입니다. 고급 한식 레스토랑뿐 아니라, 골목 맛집, 길거리 음식 등 홍보의 다각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죠."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