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의심해 남편 몰래 한 통화 녹음…대법 "증거 능력 있다"

'돈 선거' 수사 과정서 핵심 증거로 발견
피고 "불법감청돼 증거능력 없어" 주장
법원 "사생활 침해 비해 증거 필요성 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상대방의 동의 없이 위법하게 녹음한 통화가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하지 않았다면 형사재판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공공단체등위탁선거에관한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수산업협동조합 조합원 A씨 등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대법원은 "A씨의 배우자가 A씨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침해해 통화내용을 녹음했더라도 해당 전화 통화 내용 부분은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A씨는 2019년 3월 실시된 제2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를 앞두고 조합원 B씨와 조합장 후보 C씨 등과 공모해 선거인들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사전선거운동 등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경찰은 A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포렌식 하는 과정에서 A씨와 다른 피고인들 사이의 통화 녹음파일과 A씨와 배우자 사이의 통화 녹음파일을 다수 발견했다. 검찰은 이 통화 녹음파일 전부를 증거로 제출했다.하지만 증거로 제출된 녹음파일들은 A씨의 배우자가 불륜을 의심해 몰래 휴대전화의 자동 녹음기능을 활성화해 저장된 파일들이었다. 이에 피고들은 "통신비밀보호법 제4조에 따라 불법감청에 의한 전기통신내용은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A씨와 B씨에 대해 각 징역 10개월을, C씨에 대해선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녹음 파일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공소된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A씨와 B씨에 대한 1심 판결을 유지했다. 다만 녹음파일 가운데 A씨와 다른 피고인들 사이의 통화 녹음파일 부분은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C씨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됐지만, 범행 최종 책임자라는 이유로 형량이 징역 1년 4개월로 늘었다. 피고인들은 모두 상고했다.대법원은 "이 사건은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이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양측 상고를 기각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증거 수집 절차가 개인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벗어난 것이라면 곧바로 형사소송에서 진실발견이라는 공익이 개인의 인격적 이익 등 보호이익보다 우월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다만 그러한 한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형사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대법원은 "A씨의 배우자는 전화 통화의 일방 당사자로서 통화내용을 몰래 녹음했더라도 그로 인해 A씨의 사생활의 비밀, 통신의 비밀, 대화의 비밀 등이 침해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며 "음성권 등 인격적 이익의 침해 정도도 비교적 경미하다"고 지적했다.그러면서 "배우자가 녹음파일 등을 제3자에게 유출한 바도 없다"며 "녹음하면서 피고인들의 범행에 관한 증거로 사용하겠다는 의도나 계획도 없었고, 수사기관 역시 적법하게 압수한 휴대전화를 분석하던 중 우연히 이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또 "피고인들의 행위는 '돈 선거'를 조장하는 중대범죄에 해당한다"며 "피고인들의 공모관계를 비롯한 구체적 범행 내용 등을 밝혀 줄 수 있는 객관적 증거인 녹음파일을 증거로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높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인이 수집한 사생활 영역 관련 증거의 증거능력 판단기준에 관한 대법원 판례 법리를 재확인했다"며 "그 녹음 경위, 녹음 내용 등에 비춰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설명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