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잡소리가 들려올 때 피아니스트 머릿속에 드는 생각

[arte] 이은아의 머글과 덕후 사이
풍요로운 클래식 덕후 생활을 위한 추천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아끼는 ‘머글’로서 연주를 접하고 느끼는 감상에 좀더 음악적이고 지적인 깊이를 더하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음악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 정답은 없다. 하지만 ‘덕후'를 지향하는 1인으로서 지식이 결여된 감상을 내놓기란 여간 꺼려지는 일이 아니다. 머글과 덕후 사이 어느 즈음에서 음악 감상 여정에 지적인 태도 한 스푼을 더하려면 독서가 제격이 아닐까. 새해 더욱 풍요로운 덕후 생활을 위해 곡, 작곡가, 나아가 연주자와 레코딩 등에 대한 도서 5종을 소개한다. (본 추천글은 출판사 및 작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율의 시간(민음사) - 이종열

같은 곡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새롭고 다르게 들리는 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의 묘미 중 하나이다. 가장 먼저 와닿는 차이점은 바로 음색이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영롱하고 반짝이는 소리를 내지만 또 다른 피아니스트는 담백하고 순연한 소리로 곡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또 어떤 연주자는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 대신 ‘뵈젠도르퍼' 악기만을 고집하기도 한다.요 몇 주 아연실색한 음색과 넘사벽의 프레이징으로 레전드 내한 연주를 선보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본인의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조율용 장비들도 늘상 휴대한다고 한다. 왜 그런지, 연주자마다 악기마다 발현되는 차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많았는데 ‘조율의 시간'을 읽고 꽤 많은 지식을 얻었다.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인 작가는 이 책에서 건반의 무게, 페달의 높이, 홀의 음향 상태에 따른 보이싱 등 피아노 조율의 실제를 다루지만 머글로서 더욱 재미있는 부분은 세계 유수의 연주자들과 악기를 조율하며 경험했던 에피소드들이다.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자가 있다면 그 연주자의 음색과 주법을 떠올리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좌) 2017년 2월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 / (우 상) 2014년 12월 정명훈 피아노 독주회 / (우 하) 2019년 2월 원코리아 유스오케스트라 패컬티 콘서트. 세 연주회 모두 피아노 음색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 알렉상드르 타로 지음, 백선희 옮김

저렇게 복잡한 곡을 저렇게 휘황하게 연주해내는 무대 위 솔리스트들을 보면서, 그들의 내면은 어떤지 무대 밖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는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에서 전 세계 크고 작은 홀에서 혼자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가감없이 서술한다.

박수 갈채와 환호에 곧장 이어지는 고독과 침묵, 점점이 이어지는 비행과 연주회, 견디기 힘든 시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야 하는 음악적 과정들이 담담하게 이어진다. 분장실에서,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대기실에서, 무대 위에서 그리고 연주 후 숙소에서, 인터뷰에서, 녹음실에서 어떤 일들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세하게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유명한 홀과 음악 축제들에 대한 타로의 견해였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대한 피아니스트의 심경도 재미있다. 알렉상드르 타로 '피셜', 최고의 홀은 보스톤 심포니 홀이고 가장 같이 연주하고 싶은(?) 지휘자는 야닉 네제 세갱이다. 객석의 박수 소리로 관객의 만족 여부를 당연히 알 수 있고, 연주 중 기침 소리, 가래 소리, 속삭임까지 연주자에게 전부 전달되어 연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 꼽은 최고의 연주홀은 보스톤 심포니 홀이다. 2018년 3월. 이 날은 안드리스 넬손스의 지휘로 첼리스트 요요마가 R.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를 연주했다

피아노를 듣는 시간(한스미디어) - 알프레드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알렉상드르 타로의 책을 통해 연주자의 섬세하고 때로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내면을 엿봤다면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서는 음악과 삶에 대한 거장의 넉넉한 관조를 읽을 수 있다. 아흔이 넘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이 책의 독자를 이제 막 음악인으로 걸음마를 시작한 후배 연주자들로 상정한 듯 하다.

어떤 태도로 음악을 대해야 하는지, 각 작곡가가 악보에 지시한 여러 정보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음악에 반영해야 할 지에 대해 따뜻한 어투로 조언한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이 두 작곡가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단순함, 고요, 피아노 협주곡, 그랜드 피아노 등 여러 키워드들을 주제로 간결하게 할아버지의 지혜를 설파한다. 하나의 키워드 당 두 페이지를 넘지 않지만 읽는 순간 곧바로 알프레드 브렌델의 음악처럼 고요하면서도 명료한 정서가 만들어진다.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문학동네)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수많은 음악과 연주, 그 제각각의 개성이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맛깔나는 단문과 만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는 과거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라는 책도 출간한 바 있는 유명한 ‘성공한 덕후'이다. 그가 수집한 수많은 LP들은 디자인도 제각각이다. 곡목도 별처럼 많은데 오케스트라별로, 지휘자별로, 연도별로 이렇게나 많은 레코딩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의 광활한 감상 커버리지다. 버르토크와 플랑크의 교향곡은 물론이고 돈 후앙, 카르미나 부라나 등의 오페라,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5중주, 현악 4중주 등 실내악까지 세상의 모든 클래식 음악을 섭렵했다. 각 레코딩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명하게 짚어나가면서 호불호 요소를 정리한다. 덕후가 아니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펭귄클래식코리아) -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톨스토이와 베토벤이라니 어딘지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조합이 아닌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독일 음악의 거장 베토벤의 작품 ‘크로이처 소나타'를 모티브로 삼아 치정극(!)을 썼다는 점이 재미있어 추천 목록에 올렸다.

‘크로이처 세계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체코의 작곡가 야나체크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또 영감을 받아 ‘크로이처'라는 이름의 현악 4중주를 작곡했다. 음험하면서도 익살맞고 때로는 처절한 멜로디와 다이내믹이 제법 소설과 닮았다. 원작인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를 잇는 톨스토이의 중단편 소설, 이어 세계관 완성본인 야나체크의 현악 4중주를 번갈아 감상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상상력이란 무엇인지, 그 불꽃은 어떻게 타오르게 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감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