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밑바닥에도 희망은 있다"…수십명의 인생을 '살아낸' 여배우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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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은아의 탐나는 책새해에는 순한 것을 바라게 된다.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는1) 마음 같은 것을. 좋은 어른을 만나고도 싶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주어도 내가 크게 받을 수 있는 걸 어느 때고 선뜻 내어주는 사람을. 긍지를 가진 사람도 어디 나타나면 좋겠다. “나는 무엇에 몰두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47) 성실은 더도 덜도 아니고 ‘나만큼만’ 다했다면서, 저런 말을 툭 뱉어내는 사람 옆에서 눈을 빛내고 싶다. 그런 사람이 자기 생긴 대로 사는 얘기를 해주면, 나 사는 것쯤 잠시 잊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 같다.
김혜자, 『생에 감사해』, 수오서재, 2022(최민화·마선영·박세연 편집)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띄어쓰기 문제 때문에 고민할 때, 한번은 나보다 책을 천 권은 더 만들었을 것 같은 선배 편집자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 거에 너무 매달릴 필요 없어. 빈칸은 공백일 뿐이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공백에 나한테만 보이는 무슨 알맹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헛된 권한에 심취해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안해졌다. 지금도 저 말을 생각하면서 혼자 해방도 되고 안심도 한다. 어른이 옆에 있으면 무안함을 반겨 덕담으로 남길 말들이 속에 잘 쌓인다.김혜자 배우의 자서전 <생에 감사해>는 정초에 읽기 좋은 책이다. 한 사람이 사는 얘기라서도 그렇고, 수십 명의 인생을 산 배우 얘기라서도 그렇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는 것, 그것이 그 여자의 표정”(277).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를 그는 “무심코 길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 할머니에게서 그냥 쉬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있어서 발걸음을 멈춘 것인지 느껴질 때가 있는 것처럼”(276) 연기했다고 한다. 몸소 살아낸 배역들을 돌아보며 저자는 그게 곧 나예요, 하고 말한다. 그것들은 사랑스런 것이든 기구한 것이든, 다정하고 순박한 것이든 “아주 진절머리 나게 (…) 너 죽고 나 죽자”(190-191) 하는 것이든 다 그럴 만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저자는 작품을 어떻게 고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답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배역이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 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나, 그 희망을 연기할 구석이 있나, 내일의 이야기가, 혹은 그다음이 보이는가? (…) 그것을 찾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19) 숨 쉬는 것처럼, ‘연기는 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그 인물이 돼서 산다는 사람이니까…. 무슨 작품 할 거냐는 저 질문을 어떻게 살 거냐는 질문으로 읽어도 그는 넘어가줄 것이다. 자기를 연기하며 “살아, 네 힘으로 살아”(59)라는 대사도 건네줄 것이다.1) 울라브 하우게,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임선기, 봄날의 책, 2017, 43쪽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