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이 고이 간직한 문화재… 중앙박물관에서 다시 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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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2년만에 재개장"일제로부터 지켜야 한다며 외할아버지가 사재를 털어 구입하신 백자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년 만에 다시 만나니 뭉클하네요. 철없던 시절에 저기 있는 도자기로 소꿉놀이하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죠."
이홍근 기증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 등
기증 문화유산 1671점 한 자리에
110여명 기증자 기증품 선보여
'세한도' '수월관음도'는 5월 5일까지 특별공개
11일 서울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을 찾은 노현(63) 씨는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노 씨의 외할아버지 수정 박병래 선생(1903~1974)은 일제강점기 당시 수집한 백자 375점을 1974년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병래 선생 같은 민간인이 건네준 유물을 기증관에서 전시해왔는데 지난 2년간은 문을 닫았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관은 12일부터 재개관한다. 새 단장을 마친 이곳에는 박병래 선생을 비롯해 110여명의 기증자가 남긴 작품 1671점이 전시된다. 지난 2020년 손창근 선생이 기증한 '세한도'와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기증한 '수월관음도'는 5월 5일까지 특별공개된다. 국보로 지정된 송성문 기증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15', 이근형 기증 '이항복필 천자문'(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유산도 여럿 볼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손기정 선생의 '그리스 청동 투구'가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으로 주어졌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작품이다. 투구는 이후 50년이 지난 1986년에서야 국내 반입됐다. 손기정 선생은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투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전시 공간은 기증자의 사연이 담긴 토기와 도자기에서 금속공예품, 목가구, 서화, 근현대 판화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해 조성했다.
먼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중 국외로 반출되거나 훼손될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과 후손들이 지킨 문중 문화유산 등을 한 데 모았다. 1980년부터 네차례에 걸쳐 총 1만202점에 이르는 작품을 기증한 동원 이홍근 선생(1900~1980)의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보물로 지정된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을 비롯해 70여점의 도자기가 걸렸다. 외국에서 기증받은 작품을 위한 공간도 마련됐다. '기증 문화유산의 다채로운 세계'에는 우리 옛 생활문화를 담은 문방과 규방 공예품부터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 등 다양한 테마의 작품을 모았다. 한·일 양국의 친선우호를 위해 가네코 가즈시게가 기증한 1499점의 작품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지의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마지막 공간은 '전통미술의 재발견'을 주제 선정했다. 옛 물건들의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작가들의 기증품을 소개한다. 판화가이자 공예가 유강열 선생(1920~1976)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삼국시대 토기와, 이에 착안한 유 선생의 목판화를 나란히 선보인다.
기증품에 우열을 매기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런데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전시관 맨 끝에 자리한 '세한도'다. 추사 김정희(1876~1856)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시절 서적을 보내주던 제자 이상직에게 답례로 보낸 그림이다. 힘을 잃은 듯 가느다란 붓끝으로 그린 집과 과감한 필치로 그려낸 소나무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세한도의 여백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인장이 찍혀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은 "이번 재개관을 통해 기존 20여명에서 5배가 넘는 110여명 기증자의 기증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며 "기증자분들의 뜻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재개관 기념으로 특별 전시된 '세한도'는 오는 5월 5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