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지하 깊은 곳, 세상에서 가장 긴 미술관이 있다

[arte] 배세연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디자인은 특별한 곳이 아닌 우리 일생에
40년 만에 바뀐다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의 디자인을 가만히 보다가 새삼스럽게 ‘지하철역이 진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역이 많다는 것은 땅 밑에 그만큼 많고도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누군가는 매일 그곳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하철역에서는 의외로 다양한 공간 이용방식이 발생한다. 역에 입장 혹은 퇴장을 하기 위해서는 수직이동을 해야 하고, 승강장에서는 한 자리에서 서서 기다려야 하고, 긴 통로를 따라 부지런히 이동하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딘가에 눈을 두어본 적이 있었던가. 타일로 마감된 무심한 벽들과 병원광고가 난무하는 그곳에서 말이다. 스톡홀름에는 세상에서 가장 긴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지하철역들이 있다. 이는 시민들의 문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지하철 역 내부를 예술적인 공간으로 개조한, 스웨덴 정부가 1953년부터 진행해온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여기에 25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90여개의 역이 예술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이 과정에 기반암을 노출한 채 그대로 활용한 역들이 많아서 ‘지하철역’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기능적인 차가운 공간이 아닌,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visitstockholm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역은 이 프로젝트가 처음으로 실현된 곳이자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역인 T-센트랄렌(T-Centralen)이다. 이곳은 온통 푸르다. 푸르게 칠해진 거친 돌 벽의 공간을 통과하면 푸른 색상의 거대한 넝쿨식물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뻗어 올라가는 벽화가 그려진 승강장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승강장의 어두침침함이 아닌, 거대한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에는 또한 노동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이들을 주제로 하여 그려진 푸른 벽화의 연장이 공간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푸른색과는 반대로 온통 빨강과 초록으로만 채워진 공간도 있다. 이것은 일몰의 색상과 숲의 색상이다. 솔나 센트럼 역(Solna Centrum Station)에서는 스웨덴의 환경, 삼림파괴와 같은 사회적인 이야기를 이 벽화 안에 내포하고 있다.
ⓒvisitstockholm
오덴프란 역(Odenplan Station)에서는 공간의 상부를 흐르듯이 채우고 있는 지그재그 모양의 백색 조명 라인이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동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기가 탄생하는 과정 중 모니터에 나타난 심장박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지금은 그 생명의 선이 시민들이 이동하는 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visitstockholm
반면 할론베르겐 역(Hallonbergen Station)은 아이들의 낙서, 아이들이 오려 만든 종이인형과 같은 작품으로 가득 차있다. 이로 인해 위의 역들과 같이 본격적으로 예술성을 전달하는 공간이 되기보다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가벼운 즐거움과 경쾌함을 주는 귀여운 공간이 된다.
ⓒvisitstockholm
스톡홀름의 지하철역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디자인을 하여 역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지하철역을 다니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예술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하철역들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디자인이 독특하다던가 예술적으로 잘 꾸며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시민들이 생계를 위해 바쁘게 이동하는 과정에 있는 장소, 사용자가 특정되지 않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를 경제적 논리로 대하지 않고 이와는 반대적인 관점으로 대한 것에 그 특별함이 있다. 디자인은 특별한 곳이 아닌 사람들의 당연한 일상 속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일상 속에서 잘 디자인 된 것들을 누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당연한 생활의 배경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삶은 더 좋아질 수 있다. 스웨덴 정부는 일상적인 생활환경을 잘 조성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질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여기에 근-현대를 지나오는 동안 스웨덴 디자인이 실천한 정신이 있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 중에 문득 마주친 것이 푸름을 내뿜는 식물이거나, 아이들의 티 없는 천진함이거나, 생명을 알리는 하나의 선과 같은 희망이었을 때 우리의 일상은 분명 조금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조금의 풍요가 쌓였을 때 삶 또한 조금은 더 좋아질 것이다. 디자인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