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인간이 사라진 세상의 로봇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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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심완선의 SF라는 세계소설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은 어엿한 성인이라 불러볼 만하다. 이 소설은 3편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편이 세상에 등장한 후로 마지막 편이 나오기까지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성인 한 명이 자랄 만한 시간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주인공 ‘케이’ 역시 천천히 성숙했다. 처음에는 다소 치기 어린 젊은 대학원생이던 그는 마지막엔 은퇴를 준비하는 낡은 로봇이 된다.<종의 기원담>은 로봇의 이야기다. 로봇과 인간의 관계는 SF에서 오랫동안 다루어진 주제다. 그동안 많은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감히 인간을 선망하거나, 바보 같은 오류에 빠졌다. 이런 작품 다수가 은연중에 인간이 우월하다고 전제한다. 인간에게는 무언가 고유한 인간성이 있다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종의 기원담』의 관점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로봇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대신 ‘로봇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로봇에게 인간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 물러난 세계에서 로봇은 자유롭게 번성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온통 로봇이다. 작중 세계에서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멸종한 지 오래다. 지구는 도무지 생물이 살지 못할 공간이 되었다. 사시사철 ‘공장’이 ‘검은 구름’을 뿜어 하늘을 가린다. 햇빛이 내리쬐는 일은 없다. 지표면은 극히 냉각되었다. 영하 80도면 로봇들에겐 포근한 날씨다. 미래의 지구에선 기계 몸체가 아니고선 살아남지 못한다. 로봇들은 현재의 인류와 같은 위치에서 살아간다. 자신들이 생물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다.
『종의 기원담』,김보영
로봇들이 상상하는 ‘신’의 모습 역시 인간형과 거리가 멀다. 신의 초상은 더없이 로봇이다. 그는 피부 대신 반짝이는 금속을, 다리 대신 견고한 바퀴를 지닌다. 그런 몸이야말로 로봇들이 숭상하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로봇 3원칙은 어느샌가 로봇 3계명으로 바뀐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고안한 로봇 3원칙은 인간이 존재할 때나 의미가 있다.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원칙은 신앙심을 표현하는 계명으로 둔갑한다. 인간이란 말은 의미불명이고, 그것이 신이라면 로봇이 해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로봇들은 자신에게 프로그래밍된 원칙을 본능적인 신앙심이라고 여긴다. 그래도 된다. 인간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는.작중 로봇들이 논하는 ‘과학’을 보고 있자면 기분이 이상하다. 작품 속 생물학에 따르면 생명체의 첫 번째 요건은 ‘의지가 있을 것’이다. 현실의 생물학 교과서는 번식능력 등 신체적 요건을 제시하지만, 작중에서 이런 기준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이 기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도구와 살아있는 로봇을 구분짓는 요소는, 육체가 아니라 바로 자유의지다.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행동할 수 있어야만 생물이다.소설은 로봇들의 과학을 상당히 정합적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진화론을 믿는다. ‘유기생물’이라는 소리를 괴상하게 받아들인다. ‘유기생물학’은 학술적으로 미심쩍은 신생 학문이다. 하지만 케이와 동료들은 기어코 유기생물을 재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재)탄생한다. 로봇이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복종하는 대상이 신화에서 걸어나온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로봇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흐트러뜨린다. 다시 말해, 로봇이 생명체답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케이는 인간에게 굴종하고 싶다는 본능에 저항한다. 세 편의 소설은 각각의 방식으로 여운을 남긴다. 소설에 붙은 부제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종의 기원담>은 한 권 안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뻗어나간다. 작중의 사건은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내용이 정말로 구현될지는 중요치 않다. 가능성과 허구가 혼재된 이야기, 그것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세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종의 기원담>은 비인간의 관점을 체험하는 귀한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