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는 힐마에게 '추상화 시초' 타이틀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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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나의 작품을 알리지 말아요"
# 60만명이 몰린 무명화가의 전시회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낯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미래를 위한 그림’이라는 제하의 전시회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들은 전시된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멍한 상태에 빠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전시된 그림들은 예술, 하면 떠오르는 서유럽이나 남유럽에 비해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의, 그것도 여성 화가인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그림들이 그들의 것보다 먼저 그려졌다는 사실은 미술계를 혼란에 빠뜨리고야 만다.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작품은 서양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은, 추상화의 원조 혹은 대표격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그보다 먼저 힐마 아프 클린트는 그 작품들의 프로토 타입 같은 작품을 이미 그려낸 것이다. 더욱 혼란스럽고 놀라운 것은 힐마 자신이 이 작품들을 꽁꽁 숨겼으며 자신의 사후 20년 동안 이 그림들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영화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에 담겨 있다.
# 힐마 아프 클린트
힐마 아프 클린트는 고등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제독이었던 아버지는 워낙 총명하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힐마에게 천문학, 항해술 등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힐마는 그림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스톡홀름 왕립 미술원을 졸업했는데 초기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힐마는 학교에서 그림만 배운 것이 아니라 평생 친구들을 얻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의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여동생의 사망이다. 이때부터 힐마는 (당시 시대상도 그러했지만) 영적인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20세기 초는 영지학 혹은 영매술 등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때이기도 하고 이런 모임도 꽤 많았는데 힐마 또한 이 분야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또 하나 19세기말은 오스트리아의 세기말학파를 떠올릴 수 있듯이 문화 예술계의 지각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고 이어지는 20세기 초까지 수과학의 엄청난 발전과 지각변동이 있던 때이다.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서 다차원 우주, 양자역학 등등 이제까지의 과학의 근간을 흔들어버릴 만큼 엄청난 가설과 이론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이런 시대의 흐름과 새로운 개념은 수과학자들 뿐 아니라 문학과 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달리나 피카소, 에셔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다차원의 시공간을 2차원 평면에 구현한 것이며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 또한 지금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시공간을 뛰어 넘는 시공간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힐마의 개인적인 상황과 관심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작풍을 탄생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힐마의 추상화이다.
한 작가의 작품 성향이 바뀌는 시기가 있다. 시그니처가 바뀐다든지 색감이나 구도의 변화가 바뀐다든지 한 작가의 초기작부터 살펴보면 분명히 그렇게 분기가 되는 때를 알아볼 수 있다. 힐마의 경우는 영적 세계에 그의 마음이 쏠리면서 지향점이 바뀐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힐마가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원자의 개념, 자연과 우주에 널려 있는 프랙탈 구조, 영적인 세계 ... 힐마가 자신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 그의 작품의 진가와 반응
그렇다면 이렇게 획기적이고 대단한 힐마 아프 클린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왜 이렇게 늦었을까?일단 힐마는 생전 자신의 추상화를 공개하지 않았다. 수많은 작품과 그에 대한 기록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 20년 간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힐마의 모든 작품과 기록은 조카에게 남겨졌고 이 방대한 미지의 세계를 조카 또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힐마의 작품이 ‘발견’되고 ‘공개’되고 ‘전시’가 되면서 미술계의 이목이 쏠리게 된다. 언급했듯 서양 추상화의 시작은 힐마 아프 클린트임이 밝혀졌고 공개된 그의 작품들은 크기나 기법, 색감 등이 독창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중심으로 써내려온 서양미술사는 ‘여성’인 힐마에게 몬드리안, 칸딘스키를 제치고 추상화의 시초라는 타이틀을 내 줄 수가 없다. 모든 기록과 자료와 작품이 명백하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밝히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힐마 아프 클린트가 비비안 마이어와 상당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고 방대한 양의 작품과 기록을 남겼으며 조카가 그것들을 물려받았고 이러저러한 연유로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작품들이 드디어 대중과 평단에 공개되었고 그 반향이 크다는 점에서 말이다.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자신의 사명처럼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은 것일까.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끌려 명성이나 부, 외면에 걸쳐지는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내면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전진한 것뿐일까.
# 많은 예술가들에게 모티브를 주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는 북구의 하지를 소재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공포를 그렸다. 아름답고 나른한 평온으로 가장된 이 곳의 시간들은 스멀스멀한 공포를 이끌어내는데 축제를 맞아 흰 옷을 입고 머리장식을 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동심원을 그린 것을 부감으로 잡아 낸 쇼트가 있다. 바로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원시적 혼돈 no.16>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다. 또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퍼스널 쇼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힐마 아프 클린트를 소개한다. 감독은 힐마를 추상화의 창시자라고 평가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주인공 모린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새롭게 보아야 할 힐마 아프 클린트
단순히 뛰어난 재능과 머리를 가졌던 사람이 아니다. 우연히 추상화의 시초를 연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논제와 탐구하는 정신과 자세 그리고 추진력 사물과 자연, 우주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자양분이 된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의 파장을. 그리고 많은 것이 흔들리고 새롭게 규정되고 쓰여져야 할 것이라는 것을.자신의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 천재들이 왕왕 존재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 역시 그 명단에 이름을 넣어야 할 것이다.덧붙여,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개봉에 앞서 기자시사회와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나는 모더레이터로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 이숙경 관장과 기자들의 간담회 사회를 보았는데 이숙경 관장의 해설과 추천사가 깊이 와 닿았다.
‘백 여 년 전, 북유럽에서 살았던 힐마 아프 클린트. 시공간적 조건으로 볼 때 우리와 조금은 떨어져 있는 인물인 것 같지만 한 개인으로 여성으로 예술가로 그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삶의 가치와 연결될 것’이라는 이숙경 관장의 추천사를 함께 전한다.
* 영화 이미지 제공 : 마노엔터테인먼트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찬란 (<미드소마>, <퍼스널쇼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