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겨울날,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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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겨울날
신경림


우리들
깨끗해지라고
함박눈 하얗게
내려 쌓이고

우리들
튼튼해지라고
겨울 바람
밤새껏
창문을 흔들더니새벽 하늘에
초록별
다닥다닥 붙었다

우리들
가슴에 아름다운 꿈
지니라고

[태헌의 한역]
冬日(동일)欲使吾輩心淨潔(욕사오배심정결)
密雪白飛自積厚(밀설백비자적후)
欲使吾輩身康健(욕사오배신강건)
冬風通宵搖窓牖(동풍통소요창유)
曉天綠星密密張(효천록성밀밀장)
欲使吾胸有希望(욕사오흉유희망)

[주석]
* 冬日(동일) : 겨울날.
* 欲使(욕사) : ~로 하여금 ~을 하게 하고자 하다. / 吾輩(오배) : 우리들. / 心(심) : 마음.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淨潔(정결) : 맑고 깨끗하다.
* 密雪(밀설) : 펑펑 내리는 눈, 함박눈. / 白飛(백비) : 하얗게 날리다, 하얗게 내리다. / 自(자) : 저절로, 스스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積厚(적후) : 두텁게 쌓이다.
* 身(신) : 몸.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康健(강건) : <기력이> 튼튼하고 굳세다.
* 冬風(동풍) : 겨울바람. / 通宵(통소) : 밤을 새다, 밤새껏. / 搖(요) : ~을 흔들다. / 窓牖(창유) : 창문. ‘牖’는 들창이라는 뜻이다.
* 曉天(효천) : 새벽하늘. / 綠星(녹성) : 초록별. / 叢叢(총총) : 들어선 것이 빽빽한 모양. 원시의 ‘다닥다닥’에 해당하는 역어(譯語)로 역자가 골라본 것이다. / 張(장) : 펼쳐지다. 압운(押韻)을 고려하여 원시의 ‘붙었다’에 해당하는 역어로 역자가 골라본 것이다.
* 吾胸(오흉) : 우리 가슴, 우리들 가슴. / 有(유) : ~이 있다, ~을 지니다. / 希望(희망) : 희망. 원시의 ‘꿈’에 해당하는 역어로 역자가 골라본 것이다. 원시의 ‘아름다운’은 한역 과정에서 한역이 누락되었다.

[한역의 직역]
겨울날우리들이 마음 깨끗하게 하고자 하여
함박눈 하얗게 날려 저절로 두텁게 쌓이고

우리들이 몸 튼튼해지게 하고자 하여
겨울바람이 밤새껏 창문 흔들더니

새벽하늘에 초록별 빽빽이 펼쳐졌다
우리들 가슴속에 꿈을 지니게 하고자 해서

[한역노트]
겨울은 눈과 바람의 계절이다. 그러기에 역자는 겨울이 깊어가면 학창 시절에 읽었던, 김진섭(金晋燮) 선생의 「백설부(白雪賦)」 한 대목을 이따금 떠올려보고는 한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抒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비록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신경림 선생 역시 ‘겨울날’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눈과 함께 바람을 거론한 것을 근거로 얘기해 보자면, 눈과 바람은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이 눈과 바람은 「백설부」에서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적지 않은 시련을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경림 선생의 이 시에서는 적어도 바람만큼은 시련의 뜻으로 읽힌다. 이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 시의 제1연은 함박눈처럼 하얗게 깨끗해지라고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건지 언급이 없다. 제2연은 겨울바람이 밤새도록 창문을 흔드는 것과 같은 시련이 있어도 튼튼해지라고 얘기한 것인데, 이 역시 무엇이 튼튼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 대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역자는 일차적으로 튼튼해지라는 것을 몸(신체)에 대한 일로 이해하고 나서, 앞의 연(聯)으로 되돌아가 깨끗해지라는 것을 마음에 대한 일로 추정하고, 이를 한역시(漢譯詩)에 반영하였다.

역자는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영혼이 순수해지는 것으로, 몸이 튼튼해진다는 것은 시련에 맞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지고 보면 후자 역시 마음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으나, 단련된 강인한 정신력은 대개 강인한 체력 위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튼튼해진다는 것은 결국 몸과 함께 마음의 영역을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에서는 핵심 소재로 눈과 바람에 이어 별이 차례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순차성(順次性)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겨울날’이라는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눈이 밤이 되어 내리고, 바람이 밤새도록 불고, 새벽하늘에서 별이 반짝인 것이라면, 이 시의 제목은 ‘겨울날’이 아니라 ‘겨울밤’이 되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별이 반짝이는 새벽 역시 밤의 시간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이 내린 것이 낮의 일일 때, ‘겨울날’이라는 제목과 핵심 소재의 순차성이 한결 유의미해지게 된다.

한낮 혹은 오후 어간부터, 아니면 훨씬 그전부터 함박눈이 내려 쌓였다고 가정할 때, 밤새도록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는 것은, 시련의 시간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1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쌓인 눈 자체가 시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쌓인 눈 위에 부는 바람은 필경 한기(寒氣)를 돋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햇빛도 없는 밤이다. 바람이 창문을 덜컹거리게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 틈으로 스며들기도 했을 한기는 안면(安眠)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역자는, 시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이 안면방해가 시련을 비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어쨌거나 그런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새벽하늘에서 초록별이 다닥다닥 붙어 눈이 시리도록 반짝인다. 그제쯤 별빛은 시련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이 언급한 ‘별’에 대해 잠깐 얘기해 보기로 하자.

별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도 있고, 어린 왕자의 별도 있고, 황순원의 별도 있어 일일이 예거(例擧)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시인이 얘기한 별은, 일제(日帝)라는 암흑기에 윤극영(尹克榮) 선생이 작사하고 작곡한 동요 「반달」에서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라고 한 대목에 보이는 ‘샛별’에 보다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차가운 겨울 새벽하늘에서 반짝이는 모든 별이 다 샛별인 것은 아니어도 우리가 등대로 삼을 그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별은 우리에게 하나의 꿈, 곧 희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역자가 소개한 적이 있는 러시아 속담에 “희망의 왕국에는 겨울이 없다.”는 말이 있다.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겨울이 겨울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꿈이라는 것이 있다면 시련이 시련이 아니라는 말 역시 가능해진다. 우리가 그 어떤 시련이 있어도 꿈을 내려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 시대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있을 것이다. 시련을 마주하여 막막함을 느끼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용기를 주고자 역자는 이 시를 올해의 첫 시로 골라보게 되었다. 아니, 남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하여 이 시를 고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기회를 빌려, 일에 휘둘려 헉헉대느라 꿈마저 잊고 살았던 나날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시작을 세팅(Setting)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어야 희망의 등불이 켜질 테니까……

4연 15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6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앞부분 4구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마지막 2구는 매구마다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厚(후)’, ‘牖(유)’, ‘張(장)’, ‘望(망)’이 된다.

2024. 1. 16.<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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