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작가들이 겪은 이민자의 설움 ... 현실과 상상이 캔버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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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귀미, 현남, 켄건민, 임미애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해외로 떠나 작업세계를 펼친 작가들. 그들이 겪은 이민자로서의 삶이 작품으로 펼쳐졌다. 한국에서 보낸 유년기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이방인이기에 겪은 슬픔과 고뇌, 그리고 설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는 그룹전 ‘원더랜드’에서다. 이번 그룹전을 통해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작가 4인 유귀미, 현남, 켄건민, 임미애의 신작이 한 곳에 모였다.
리만머핀 서울 그룹전 '원더랜드'
전시 제목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원더랜드’에서 차용했는데, 단어가 주는 의미 그대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우리 주변의 풍경과 인물,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작가들의 상상력이 만든 동화 속 세상이 한 캔버스 안에서 섞였다.유귀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과거의 일상 공간을 그린다. 그가 직접 가 봤거나, 경험했던 장소에 상상과 비현실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들을 내놨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보금자리를 튼 유 작가는 이민자이자 여성으로, 또 한 아이의 어머니로 타지에서 느꼈던 고립과 단절을 그림으로 승화시킨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자신의 기억 속 미국과 한국의 풍경을 나란히 걸어놨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 ‘그린 레이크’는 이민자로서의 공허함을 느낄 때마다 찾던 샌프란시스코 공원의 풍경과 상상 속 호수의 이미지를 더해 그려냈다. 바로 옆엔 반포 한강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담은 한국의 풍경이 걸렸다.유 작가는 “머릿속에 있는 풍경의 이미지를 사진처럼 그대로 화폭에 옮겨오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다”며 “그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여러 풍경 요소들을 나름대로 재조합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말했다. 유 작가의 그림은 몽환적인 색감 때문에 마치 꿈 속 한 장면을 그린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색감 사용도 어린 아들이 읽던 그림 동화책의 삽화에서 영향을 받았다.켄건민의 ‘충격적인 작품’도 서울을 찾았다. 그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을 성경 및 고대 신화 이미지와 결합한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가진 가장 특징적 작업방식은 ‘자수’다. 유화와 한국 전통 안료를 섞고, 그 위에 비즈, 보석, 그리고 실들을 엮어 자수를 넣었다. 그래서 서양의 이미지를 그려낸 작품임에도 동양화를 보는 듯한 감상을 전달한다.
교회 아크릴 창문의 모양을 따 온 작품 '1992 웨스턴 에비뉴'는 1992년 흑인과 한인 이민자 사회 간의 무력 충돌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미국 경찰이 이민자 대신 바로 옆 동네에 거주하던 백인 상류층만을 지키기 위해 ‘폴리스 라인’을 쳤던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림에서도 이민자와 백인 사회의 극명한 대비가 드러난다. 창문 위쪽은 해가 비추며 마치 천국에 온 듯 아름다운 풍경을 담았지만, 바로 밑에서는 서로 물어뜯고 충돌하는 지옥에 온 듯한 모습이 그려졌다. 켄건민은 “신화의 한 장면같은 그림을 통해 사회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차별과 충돌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현남은 조각 작품을 들고 서울을 찾아왔다. 그의 조각은 그 소재와 기법이 특이하다. 스티로폼이나 고철 등 주변에서 버려지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조각 작업을 한다.
그는 폴리스티렌, 에폭시, 시멘트 등의 산업 재료를 사용하며 기억 속 도시의 모습을 시각화한 작품들을 만들며 유명해졌다. 특유의 기법과 재료 때문에 그의 조각은 거친 표면과 선명한 색상, 수직성이 강조된 비정형의 형태를 띈다. 이는 그가 상상하는 종말론적 미래의 도시 풍경과 폐허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민 1세대 작가’로 불리는 임미애의 작품들은 국내 처음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의 작품은 마치 파편 여러 개가 캔버스에 쏟아진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데, 작가의 유년기 기억의 조각들과 환상을 마치 파편처럼 그림으로 표현했다.이번 전시를 통해 나온 임미애의 신작들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작가가 구상과 추상 작업의 결합을 시도해 만든 ‘실험의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림의 한 부분에서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같은 그림이지만 동시에 공포감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감상의 재미다. 전시는 2월 24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