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우의 지식재산 통찰] 특허소송의 실종…'지식재산 선진국'이라면

특허권자에 비우호적…짙어진 '코리아 패싱'
예측 가능성 높이고 '親특허' 환경 조성해야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 원장
한국 법원에 외국 기업의 발길이 뚝 끊긴 지 오래다. 내로라하는 국내 최상위 변호사마저 특허 소송 실무를 경험하지 못해 초조해할 정도다. 한국은 ‘IP5’(지식재산 선진 5개국)인데 왜 외국 기업이 한국에 오지 않는 것일까?

국제 특허분쟁 해결지로 미국과 인도의 인기가 좋다. 큰 시장에서 소송하면 큰 손해배상액과 침해금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영국도 특허권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시장 크기뿐 아니라 소송 절차가 빠르고, 특허 무효의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해외 기업은 특허권자에 우호적인 국가를 선호하는 셈이다.우리는 어떨까? 특허심판 청구에서 무효 판정 비율(2022년)을 보면 일본은 15.2%, 미국은 25.1%지만 한국은 47.2%로 매우 높다. 높은 무효율은 특허소송에 불리한 국가라는 인상을 준다. 공들여 인정받은 특허가 무효가 되면 경제적 피해도 커진다.

특허침해소송은 일반 민사소송보다 오랜 시일이 걸린다. 게다가 특허권자의 승소율도 고작 7.7%로 민사 원고승소율(54.8%)에 비해 턱없이 낮다(2020년 1심 기준).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받기도 쉽지 않다. 손해배상액은 미국이 65억7000만원 수준인 반면 한국은 1억원 정도다(2020년).

‘코리아 패싱’ 얘기가 나올 만하다. 우리도 특허 친화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손해액을 현실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특허소송에서 침해자가 보유한 증거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이 시행 중인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제도가 있다. 한국은 이 제도가 없어 국내 기업조차 미국 법원으로 가는 형편이다. 특허청과 국회는 2020년부터 ‘한국형 증거수집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특허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입법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침해 현장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이를 정리한 결과보고서를 증거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음으로 법원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 판사는 인사이동 없이 장기간 경험을 축적한다.

미국이나 독일에 소를 제기하면 답변서, 반박서면, 변론기일 등의 일정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절차가 진행되므로 예측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는 법관과 스케줄의 잦은 변경으로 예측이 어렵다.

최근 국가지식재산위원회는 ‘관할집중’을 확대하기 위해 소송특위를 운영 중이다. 특위는 특허·상표 등 기존 5개 지식재산권 외에 △부정경쟁행위 △영업비밀 △반도체 배치설계권 △산업기술 등을 새로이 포섭하고, 민사본안 외에 가처분과 형사 사건도 관할집중에 포함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재판 전문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이 작년 6월 ‘통합특허법원(UPC)’을 출범시키면서 미국과 함께 분쟁해결지의 한 축이 됐다. 한국을 두고 ‘친특허 국가’를 떠올릴 정도로 신뢰를 줄 수 있는 과감한 정책을 추진해 해외 특허기업들이 앞다퉈 한국에 오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