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금파리(片), 흙 한 줌에서 발견한 도예가의 ‘시간’

[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도예가들은 재료를 대부분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같은 종류의 흙이라도 산지에 따라 색과 질감, 화도(火度, 불에 녹는 온도)가 달라, 조선시대 초기에는 특정 조건에 맞는 백토를 구하기 위해 수급에 따라 가마터를 옮기기도 하였다. 흙의 색이 눈으로 보기에는 비슷해도 가마에 넣어 높은 온도로 구우면 흙 속에 숨어 눈에 보지 않던 것들이 점, 색, 얼룩으로 올라와 예측할 수 없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불의 예술’로 부르는 도예작업은 흙만으로는 작가가 원하는 색과 질감을 만들 수 없다. 같은 유약을 시유해도 흙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것이 나온다. 내가 만나본 도예가들은 하나같이 좋은 흙, 내 작업에 맞는 흙을 다량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구하는 일에 작업 시간과 노력만큼이나 큰 애정을 쏟는다.

분청은 청자나 백자에 비해 특정 흙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미묘한 다름 때문에 결국 좋은 흙을 구하고 그에 맞는 유약, 기법을 찾는 것이 자신만의 형태와 표현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특히 분청은 작가의 아이디어나 기술의 현란함보다 흙, 유약, 불의 변화를 목도하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형태와 색, 질감이 서로 관계 맺고 결부되어 조화로운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이 결국 작가들의 조형목표다.
박성욱, 편_whiteforest304
도예가 박성욱은 이를 위해 한때 손맛, 흙 맛에 집중했던 시기도 있었고, 흔하지 않은 독창적인 형태, 설치 등의 방법에 몰두했던 시간도 있었다. 가스 가마의 불맛, 효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십수 년 전부터는 직접 전통 가마를 공부하고 손수 지어 불의 매력과 예측할 수 없는 효과에 흠뻑 매료되어 지냈다. 최근 작가는 새로운 재료의 실험이나 탐색보다는 흙이 나에게로 오기까지 미생물로 분해되어 점토가 된 시간, 그리고 내가 그것을 주무르고 형태를 빚어 만드는 관계의 시간 그리고 기물이 불로 단단해지고 끝내 영구적인 존재가 되는 시간 등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

분청 작업의 특징은 지역별, 시기별로 다양한 기법이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박성욱은 조선시대 호남에서 유행했던 덤벙, 귀얄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다구, 항아리를 비롯해 탑(塔) 형상의 조각도 제작한다. 최근에는 편(片, 사금파리)으로 명명한 평면작업을 펼치고 있다. 덤벙은 기물의 표면에 백토물 또는 색토를 발라 흙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다. 바탕색과 질감을 덮으면서도 두텁지 않아 바탕흙이 비쳐 보인다. 다른 겹의 흙이 바탕과 어울려 묘하게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야 아름답다. 작가는 이를 두고 “담담함을 간직한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은 서정과 재미를 찾는다.”라고 말한다.
작업이란 수많은 시간을 체감하고 헤아리는 시간이다. 물질을 만지면서 이 한 줌 흙이 어찌 내게로 왔을까? 경로와 물질 안에 담긴 영겁의 시간을 헤아리게 된다. 박성욱작가는 자신의 작업 시간에 견주고 나아가 주워 온 작은 사금파리 속에서 과거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도공들의 시간을 헤아린다. <편(片)> 연작은 작가가 분청사기 옛 도요지를 둘러보다 오랜 시간 동안 땅속 깊이 묻혀 있었던 사금파리를 본 후 착안해 작업하고 있다. 긴 시간 동안 노지에 파묻혀 있다 어느 날 문득 작가의 눈에 띄어 작업장까지 들고 오려면 어떤 인연이 있어야 할까? 옛 가마터에서 본 다양한 사금파리의 색과 질감을 염두에 두고 작가는 잘게 자른 흙 조각을 뽀얀 흙물에 덤벙 담그거나 혹은 귀얄(붓)로 칠한 후 장작가마에 넣어 고온의 불에 굽는다. 재(灰)가 자연 유약이 되어 조각마다 형태와 질감, 표면을 만든다.
이후 작가는 다른 표정의 분청 조각들을 확인하고 어울림을 맞춰보며 켜켜이 나란히 쌓는다. 고온의 불 속에서 약간씩 몸을 비틀거나 키가 줄어든 것이라 일렬 반듯이 맞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울리는 것을 찾아 배열하고 수를 더해 모종의 화면을 만든다. 만든 것이 붓으로 그린 것도 아닌데 달(月)이 보이기도 하고 항아리(壺)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사금파리가 모두 그저 그런가 싶어도, 막상 골라보면 같은 것 하나 없음을 확인하며, 인간의 의지로는 구현 불가능한 흙과 불의 조화를 체감한다. 불에 타버린 것들, 불로 영구화된 것들을 보며 기억과 소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절감하는 일은 매번 불을 소성할 때마다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일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다른 작업에서 작가가 사금파리를 고르고 배열하며 느꼈을 시간을 확인하려는 일이고.
박성욱, Bluemoon 17902, 2017, 90x90cm 사진 헤드비갤러리
도예가에게 작업하는 시간은 어쩌면 사물이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고 나아가 그것을 이리저리 형태를 만들겠다고 하는 나 역시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 아닐까? 작업장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할 때는 잘 만들겠다 시작하기는 하지만, 종당 억지로 하는 것, 내 주장해서 될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제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다. 도예가의 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예술하는 비범한 일 같지만 자기 재주와 노동으로 얻는 ‘이치(理致)’이니, 이것이 범인의 궁극적인 삶의 이치와 무엇이 다르랴.
박성욱, 편(片)-무리, Ceramics, 885x147cm,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