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국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나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한경닷컴 더 머니이스트

"인민공사 강제 도입하며 농업 생산량 저하"
"토법고로, 대약진운동 실패 원인으로 꼽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경분쟁까지 불거지며 양국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했고,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경제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국은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소련식 경제모델에도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습니다. 소련식 경제모델은 공업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농촌과 농민 계층으로부터 조달합니다. 그런데 1958년 중국의 농촌 경제는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약진운동은 농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습니다.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모든 혁명 과정은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연속으로 이뤄집니다. 기존의 현실을 혁명적으로 타파해야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연속혁명론을 언급했습니다. 아울러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엔 혁명적인 대약진운동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연설은 이후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 제8회 전국대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을 채택하며 대약진 운동은 시작됐습니다. 소련식 공업화가 야기한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기치로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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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농업 집단화'였습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설치하고, 농촌의 행정 조직과 경제 조직을 합쳤습니다. 인민공사는 적게는 1만명부터 많게는 4만명까지 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집단 농장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대규모 인프라 구축, 수리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인원을 편성했습니다. 인민공사를 통해 공산당은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와 분배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1958년 이후 중국 농촌의 생산, 소비, 교육,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복지의 모든 사회적 측면에서 인민공사는 중심에 있었습니다.다만 모든 농민이 인민공사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숫자의 농민들이 공산화에 반대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강제로 인민공사에 수용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고, 농업 생산성이 낮아졌습니다. 훗날 중국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대약진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중공업 발전입니다. 소련의 원조가 끊어진 상황에서 중국은 하루라도 빠르게 중공업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철이 필요했습니다. 공산당은 인민공사 뒤뜰마다 토법고로(土法高爐)를 설치해 인민들이 직접 강철을 생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토법고로는 전통적인 기술로 만든 용광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정책의 배경엔 중일전쟁이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기간 전통적 방식의 용광로로 일본군의 89식 척탄통을 복제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집마다 고로를 설치해 강철을 생산하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강철 생산 기술에 무지했습니다. 따라서 토법고로에서 생산되는 철의 질은 매우 낮았습니다. 아울러 땔감을 구하기 위해 과도한 벌목이 일어난 데다가 과도하게 철 생산에 집착해 농업 생산성이 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토법고로는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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