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신간 소설 펴내 … “살아있는 한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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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승원(85)은 고향 전남 장흥에 살고 있다. 1997년 서울 생활을 청산한 이후로 27년째다. 작업실에 ‘해산토굴’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매일 글을 쓰며 산다. 그는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비롯해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을 거머쥔 원로 소설가다.
“하루는 처음보는 중년 남자가 찾아와 ‘여기 새우젓 파냐’고 물어요. 토굴이라니까 젓갈을 담는 곳으로 오해했나봐요. 웃고 말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의미가 크더라구요. 스스로를 토굴에 가두고 양생하는 것은 저의 시와 소설과 삶이 한창 맛깔스럽게 익어가도록 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숙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온 한승원 작가가 신간 <사람의 길>을 내놨다. <신화의 늪>(2019) 이후 5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책은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에세이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에세이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즐기면서 써봤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전서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를 모두 섭렵한 사람인데, 말년에 쓴 글씨를 보면 예서체인지 해서체인지 알 수 없는 글씨를 썼습니다. 그렇게 분류를 넘나드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본래 문학은 시를 향해 가고, 시는 음악을 향해 가고, 음악은 무용을 향해서, 무용은 우주의 율동을 향해 간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그의 자평대로 이번 책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글이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환상을 넘나든다. 일상 속 에피소드를 풀어놓다가 직접 지은 시가 인용되고, 작가의 분신 같은 '율산' 등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갈매기가 말을 건네는 신화적 이야기 중간중간 현실의 검찰이나 정치인에 대한 논평이 끼어든다. 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내 최후의 길"이라고 선언했다. 그만큼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철학을 집약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서전 <산돌 키우기> 이후 자신의 일생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을 지속 중이다. 그 이유에 대해 "삶 막판의 이삭줍기"라고 설명했다.
"저는 요즘 세상을 야만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 안팎으로 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세상이고 원로들도 숨죽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길'을 생각하게 됐는데, 사람의 길은 크게 말하면 윤리적인 길입니다. 소인배들의 세상에서, 내 속에 있는 간요한 쥐새끼 지시에 따라 살지 않고 대인으로 거듭나서 사람의 길로 가는 걸 여러 방법으로 조명해보려고 했습니다."
자연에 파묻혀 도 닦듯이 사는 그도 '사람의 길'을 추구하는 건 쉽지 않다.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마음이 길을 잃기도 한다. 그는 책에서 해산토굴 진입로를 두고 이웃과 분쟁을 벌이다가 스스로의 옹색함에 놀라는 내용을 적었다. "사람이 정신과 육체로 사는데, 문제는 육체가 원하는 게 너무 많아요. 모든 정신이 육체를 호강시키기 위해 노력해버리죠.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의 길을 잃습니다." 소설 속에는 의사들이 직업 윤리를 다짐하며 외우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빗대 '국회의원의 선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온다. 그에게 '소설가의 선서'를 쓴다면 1항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한 작가는 "하나, 소인 근성을 버려라. 권력을 칭찬해주는 글은 버려라"라고 곧장 답했다.
그는 "모든 예술작품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구원, 구제"라며 "모든 사람이 그렇듯 예술가는 올바른 인간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술작품의 도달점은 향기로운 아름다움과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른 차원의 구원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네. 소설가는 도덕 교사도, 종교의 경전을 설하는 사제도 아니지만 인류의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도출하려는 차원 높은 윤리 교사인 셈이네."
문학의 길에 대한 진지한 철학, 세태에 대한 쓴소리 쏟아내던 그는 딸인 소설가 한강 이야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180도 달라졌다. '소설가 아버지로 살다가 소설가의 아버지로 사는 삶은 어떠시냐'는 질문에 그는 자부심이 어린 목소리로 "말년 들어서 딸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답했다.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한국 작가 중 최초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받았다. 한 작가는 "소설가는 책밖에 없으니 딸은 그 책 속에서 자랐다"며 "어려서 딸이 제가 읽던 책을 따라 읽었다면 이제는 딸이 골라 보내주는 책을 읽는 게 즐거움"이라고 했다. 딸은 서점과 책이 귀한 장흥으로 때마다 책을 보내온다고 했다.
"늙어가며 제가 자연친화적 삶을 사는데, 제가 좋아할 법한 책들을 딸이 많이 보내요. 제가 이끼를 좋아하니 <이끼와 함께>라는 책을 보내왔더라고요. 미국 인디언의 후손인 여성 생물학자가 쓴 문학적인, 시적인 글이라 좋게 봤어요. 같은 작가가 쓴 <향모를 땋으며>도 보내왔고, 고전 <월든>도 보내준 적 있고요."
한 작가는 1966년 등단해 등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는 원로 작가다. '사람의 길'이라는 끝 모를 목적지를 걸어온 그는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집필활동을 지속할까. 그는 "살아있는 한 쓰고, 쓰는 한 살아있다"고 말했다. "저는 사람들에게 문체로는 시나 소설 넘나드는, 어우러지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작가나 사람으로서는 '삶을 구도적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참된 삶을 살려고 애썼다고요."그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인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의 역사에서 모든 예술가들의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라고 했는데 나의 말년의 글쓰기는 어떤 모양새일까요." 그의 말년의 글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하루는 처음보는 중년 남자가 찾아와 ‘여기 새우젓 파냐’고 물어요. 토굴이라니까 젓갈을 담는 곳으로 오해했나봐요. 웃고 말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의미가 크더라구요. 스스로를 토굴에 가두고 양생하는 것은 저의 시와 소설과 삶이 한창 맛깔스럽게 익어가도록 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숙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온 한승원 작가가 신간 <사람의 길>을 내놨다. <신화의 늪>(2019) 이후 5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책은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에세이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에세이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즐기면서 써봤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전서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를 모두 섭렵한 사람인데, 말년에 쓴 글씨를 보면 예서체인지 해서체인지 알 수 없는 글씨를 썼습니다. 그렇게 분류를 넘나드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본래 문학은 시를 향해 가고, 시는 음악을 향해 가고, 음악은 무용을 향해서, 무용은 우주의 율동을 향해 간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그의 자평대로 이번 책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글이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환상을 넘나든다. 일상 속 에피소드를 풀어놓다가 직접 지은 시가 인용되고, 작가의 분신 같은 '율산' 등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갈매기가 말을 건네는 신화적 이야기 중간중간 현실의 검찰이나 정치인에 대한 논평이 끼어든다. 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내 최후의 길"이라고 선언했다. 그만큼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철학을 집약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서전 <산돌 키우기> 이후 자신의 일생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을 지속 중이다. 그 이유에 대해 "삶 막판의 이삭줍기"라고 설명했다.
"저는 요즘 세상을 야만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 안팎으로 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세상이고 원로들도 숨죽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길'을 생각하게 됐는데, 사람의 길은 크게 말하면 윤리적인 길입니다. 소인배들의 세상에서, 내 속에 있는 간요한 쥐새끼 지시에 따라 살지 않고 대인으로 거듭나서 사람의 길로 가는 걸 여러 방법으로 조명해보려고 했습니다."
자연에 파묻혀 도 닦듯이 사는 그도 '사람의 길'을 추구하는 건 쉽지 않다.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마음이 길을 잃기도 한다. 그는 책에서 해산토굴 진입로를 두고 이웃과 분쟁을 벌이다가 스스로의 옹색함에 놀라는 내용을 적었다. "사람이 정신과 육체로 사는데, 문제는 육체가 원하는 게 너무 많아요. 모든 정신이 육체를 호강시키기 위해 노력해버리죠.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의 길을 잃습니다." 소설 속에는 의사들이 직업 윤리를 다짐하며 외우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빗대 '국회의원의 선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온다. 그에게 '소설가의 선서'를 쓴다면 1항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한 작가는 "하나, 소인 근성을 버려라. 권력을 칭찬해주는 글은 버려라"라고 곧장 답했다.
그는 "모든 예술작품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구원, 구제"라며 "모든 사람이 그렇듯 예술가는 올바른 인간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술작품의 도달점은 향기로운 아름다움과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른 차원의 구원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네. 소설가는 도덕 교사도, 종교의 경전을 설하는 사제도 아니지만 인류의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도출하려는 차원 높은 윤리 교사인 셈이네."
문학의 길에 대한 진지한 철학, 세태에 대한 쓴소리 쏟아내던 그는 딸인 소설가 한강 이야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180도 달라졌다. '소설가 아버지로 살다가 소설가의 아버지로 사는 삶은 어떠시냐'는 질문에 그는 자부심이 어린 목소리로 "말년 들어서 딸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답했다.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한국 작가 중 최초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받았다. 한 작가는 "소설가는 책밖에 없으니 딸은 그 책 속에서 자랐다"며 "어려서 딸이 제가 읽던 책을 따라 읽었다면 이제는 딸이 골라 보내주는 책을 읽는 게 즐거움"이라고 했다. 딸은 서점과 책이 귀한 장흥으로 때마다 책을 보내온다고 했다.
"늙어가며 제가 자연친화적 삶을 사는데, 제가 좋아할 법한 책들을 딸이 많이 보내요. 제가 이끼를 좋아하니 <이끼와 함께>라는 책을 보내왔더라고요. 미국 인디언의 후손인 여성 생물학자가 쓴 문학적인, 시적인 글이라 좋게 봤어요. 같은 작가가 쓴 <향모를 땋으며>도 보내왔고, 고전 <월든>도 보내준 적 있고요."
한 작가는 1966년 등단해 등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는 원로 작가다. '사람의 길'이라는 끝 모를 목적지를 걸어온 그는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집필활동을 지속할까. 그는 "살아있는 한 쓰고, 쓰는 한 살아있다"고 말했다. "저는 사람들에게 문체로는 시나 소설 넘나드는, 어우러지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작가나 사람으로서는 '삶을 구도적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참된 삶을 살려고 애썼다고요."그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인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의 역사에서 모든 예술가들의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라고 했는데 나의 말년의 글쓰기는 어떤 모양새일까요." 그의 말년의 글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