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현대미술 컬렉터 크리스티안과 카렌 보로스(Christian & Karen Boros) 부부의 소장작품을 보관 및 전시하는 보로스 재단(Sammlung Boros) 건축물은 흥미로운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베를린의 중심 지역인 미테(Mitte)에 위치한 이곳은 나치 벙커로 지어졌다가, 전후에는 열대 과일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테크노 클럽이 되었다가 2003년 광고업계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크리스티안 보로스가 구입해 2008년 보로스 재단으로 개관하였다.
벙커로 사용될 당시 전화기, 화살표 등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Photo by Hyunjoo Byeon.
벙커로 사용될 당시 전화기, 화살표 등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Photo by Hyunjoo Byeon. 미술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지만 보로스 재단은 미술관이 아니다. 흔히 보로스 재단을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미술관이 아닌 사적 재단이다. 미술관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접근가능성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데, 앞서 말한 안전 상의 이유, 즉 창문이나 비상구도 없는 건축 구조를 지녔기에 미술관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벙커와 같은 역사적 장소를 사적으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주하고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러한 법적 제한을 해결하기 위해 보로스는 벙커의 루프탑에 거주할 수 있는 펜트하우스를 새로 짓고, 관객이 사전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를 따라 작품 및 공간을 볼 수 있게 하는 관람 방식을 제공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재단을 방문하기 한참 전에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더불어 관객이 전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며 비밀스러움을 유지하는 보르스 재단만의 관람 방식은 바로 이러한 법적 규율의 틈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비롯된 특징이기도 하다. 2008년 첫 전시를 개최한 후 현재 보로스 재단은 네 번째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재단 측은 전시라는 용어가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는 넒은 의미로 보며 전시로 표기하려 한다. 큐레이터나 어드바이저 없이 크리스티안과 카렌 보로스가 직접 선정한 소장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하나의 전시를 4년 동안 대중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거듭해왔고, 2022년부터 신체성을 주제로 한 새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27명의 작가 작품을 벙커의 네 개 층에서 펼쳐 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시프리앙 가이야르(Cyprien Gaillard), 안네 임호프(Anne Imhof),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ck), 안나 우덴베르크(Anna Uddenberg) 등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 받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