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벙커가 미술관으로…獨 역사따라 변신한 보로스벙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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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변현주의 Why Berlin대표적 현대미술 컬렉터 크리스티안과 카렌 보로스(Christian & Karen Boros) 부부의 소장작품을 보관 및 전시하는 보로스 재단(Sammlung Boros) 건축물은 흥미로운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베를린의 중심 지역인 미테(Mitte)에 위치한 이곳은 나치 벙커로 지어졌다가, 전후에는 열대 과일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테크노 클럽이 되었다가 2003년 광고업계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크리스티안 보로스가 구입해 2008년 보로스 재단으로 개관하였다. 이 건축물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이 처음 폭격 받은 후 1941년 히틀러의 명령 하에 도시 중심부에 벙커로 지어진 이른바 ‘나치 벙커’이다. 일반적으로 벙커는 지하에 숨기며 짓지만 이곳은 지상에 지어졌는데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말기의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건물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라 한다. 1200명까지 수용가능한 거대한 크기의 벙커는 전쟁 종료 후 포로 수용소로 사용되다가 직물 창고가 되었고, 콘크리트로 만든 두꺼운 벽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게 하기에 1950년대에는 쿠바에서 수입한 열대 과일을 보관하는 창고를 쓰이며 ‘바나나 벙커’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와 활력이 넘치던 1990년대에는 테크노 클럽이 되었는데 그 클럽 이름 역시 ‘벙커’였다. 벙커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클럽으로 사용될 당시 공간의 곳곳에 촛불을 놓아두고 촛불이 꺼지면 더 이상 산소가 없다는 의미이므로 클럽을 닫았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벙커는 클럽으로 사용되기에는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3년 후 폐쇄되었고, 이후 소장작품을 보관 및 전시할 장소를 찾던 보로스가 구입하고 개조해 2008년 첫 전시를 열며 보로스 재단이 되었다. 미술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지만 보로스 재단은 미술관이 아니다. 흔히 보로스 재단을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미술관이 아닌 사적 재단이다. 미술관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접근가능성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데, 앞서 말한 안전 상의 이유, 즉 창문이나 비상구도 없는 건축 구조를 지녔기에 미술관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벙커와 같은 역사적 장소를 사적으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주하고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러한 법적 제한을 해결하기 위해 보로스는 벙커의 루프탑에 거주할 수 있는 펜트하우스를 새로 짓고, 관객이 사전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를 따라 작품 및 공간을 볼 수 있게 하는 관람 방식을 제공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재단을 방문하기 한참 전에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더불어 관객이 전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며 비밀스러움을 유지하는 보르스 재단만의 관람 방식은 바로 이러한 법적 규율의 틈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비롯된 특징이기도 하다. 2008년 첫 전시를 개최한 후 현재 보로스 재단은 네 번째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재단 측은 전시라는 용어가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는 넒은 의미로 보며 전시로 표기하려 한다. 큐레이터나 어드바이저 없이 크리스티안과 카렌 보로스가 직접 선정한 소장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하나의 전시를 4년 동안 대중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거듭해왔고, 2022년부터 신체성을 주제로 한 새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27명의 작가 작품을 벙커의 네 개 층에서 펼쳐 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시프리앙 가이야르(Cyprien Gaillard), 안네 임호프(Anne Imhof),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ck), 안나 우덴베르크(Anna Uddenberg) 등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 받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로서 미술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주제이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가상 세계에서의 정체성 및 연결성이 주목 받은 후, 최근 그 반대 급부로 더욱 부상하여 물질성과 신체성을 재조명하는 전시 및 프로젝트가 두드러진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흐름과 경향을 반영하는 이번 전시는 신체성을 다양하게 전개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매체적 맥락에서 보면 미디어 작품은 거의 없이 주로 설치와 조각, 회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의 내러티브를 강조하기보다 각 작가의 작업을 적절한 공간에 설치하며 작가에 주목하게 하고, 초기 작품과 최근 작품을 함께 보이기도 하면서 작가의 작업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안나 우덴베르크의 초기 작품과 비교적 최근 작품을 함께 보며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 신체, 특히 여성의 몸이 소비되는 현상을 다루는 그의 작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이해하고, 작업 초기부터 지속된 수행성과 특유의 시각적 언어 –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었던 작가가 의상에서 표현하는 디테일 등 - 의 공통성을 찾을 수 있었다. 퍼포먼스 ‘Faust’로 2017년 베를린 비엔날레 황금 사자상을 받았던 안네 임호프 역시 퍼포먼스에서 시작한 작업이 어떻게 안무와 회화, 드로잉, 음악, 설치, 조각으로 확장되는지를 나타내는 작품 구성으로 소개된다. 강렬한 갈망을 작가의 아바타이자 퍼포머의 몸을 통해 표출한 퍼포먼스가 막을 내린 후 파편과 같이 남겨진 작품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퍼포먼스를 상상하며 이를 재구성하게 한다. 보로스 재단의 이전 세 개의 전시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번 전시에는 젊은 세대의 작가 작품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특히 크리스티안과 카렌 보로스는 베를린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며 이들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을 소장하는 것을 투자로 여기기보다 여러 사람들과 예술을 공유하고 작가를 지원하려는 입장과 노력이 바로 보로스 부부를 현대미술의 대표적 컬렉터가 되게 한 이유라 생각한다. 보로스 부부의 소장작품과 그들의 ‘혜안’으로 선정된 주목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굴곡진 역사 속 이야기를 담은 특별한 공간에서 경험하고 싶다면, 사전 예약을 하고 보로스 재단을 방문하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