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가 왜 보라색?" 문 닫은 미술관 '트리맨'에 모인 20명의 아트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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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나이트뮤지엄 X 스페이스K
유이치 히라코 '여행' 1시간 투어
아르떼 회원 10팀 선정해 미술관 문 닫고 '특별 관람'
"항상 갤러리에 올 때마다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섰거든요. 많은 인원이 몰리니까 작품 하나를 오래 감상하기도 어려웠는데, 오늘은 원하는 작품에 마음대로 집중할 수 있어서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이장욱 도슨트가 깊은 작가의 어린 시절이나 개인적 경험들을 같이 소개해주니까 경기도에서 여기 마곡까지 온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과천에서 시작한 스페이스K는 지난 2020년 10월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문을 열었다. 흔히 서울에 갤러리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3대 지역' 삼청동, 한남동, 강남 일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곳이다. 일정이 있어 지나가다, 혹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잠깐 들를 수 없는 위치라는 점이 스페이스K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스페이스K의 큐레이터들은 약점을 기회로 만들었다. 관람객이 지나가다 '겸사 겸사' 들르기 어렵다는 건, 오직 이 전시만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문한 관람객들의 전시 관여도는 매우 높다. 단순히 작품만 관람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며 작가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을 끝까지 관람한다. 전시와 함께 설치된 게임이나 기타 활동의 참여도도 높은 편이다. 지난 16일 오후 6시, 아르떼에서 회원들을 위해 마련한 '나이트 뮤지엄-유이치 히라코의 여행' 을 찾은 관객들도 다르지 않았다. 고양시에서, 서울 연희동과 종암동 등 각 지역에서 마곡을 찾아온 10팀의 관객들은 일반 관람객이 빠져나간 미술관 안에서 특별한 여행을 함께 했다. 아이패드를 들고 직접 도슨트의 설명을 받아적는가 하면 카메라와 휴대폰으로 연신 작품을 촬영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으로 참여했다.
이날 나이트뮤지엄의 '안내자' 역할을 맡은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의 설명은 히라코의 전시를 더욱 빛나게 했다. 연희동에서 온 A씨는 "원래 히라코 전시를 보려고 계획 했었는데, 만약 도슨트 없이 혼자 왔더라면 이해 못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수석큐레이터는 유이치 히라코가 '식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든 이유부터 설명했다.1982년생 '어촌의 아들'로 큐슈 옆 작은 어촌마을인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찍부터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던, 그야말로 '불쌍한 친구'였다. 그는 어렵사리 떠난 영국 유학에서 하이드 파크 등 공원들을 거닐며 날 것 그대로의 고향 마을을 자주 떠올렸다고. ‘영국의 꾸며진 자연은 '진짜 자연'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 히라코는 자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식물을 향한 인간 중심적인 태도와 도시의 난개발을 작품을 통해 비판했다. 다양한 식물들을 그리고 조각으로 표현했고, 그 모티브가 발전해 오늘날의 히라코를 대표하는 '트리맨'이 됐다.
이 수석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 제목인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려주며 작품의 감상법을 설명했다. '식물의 여행'을 뜻하는 이번 전시에 걸린 모든 그림의 주인공은 사람도, 풍경도 아닌 작은 식물들이다.
"해바라기씨, 도토리 등 그림 속에서는 아주 작은 요소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들이 실제 주인공이라는 게 재밌는 지점이죠." 도토리 위에 사람이 서 있는 작품 앞에서는 관객에 '깜짝 퀴즈'를 내기도 했다. 이날 참여한 관객들은 이 큐레이터가 내는 퀴즈 답을 맞추려고 고민했다. 다양한 오답들이 나온 뒤 드디어 정답을 맞춘 한 관객. 이 큐레이터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히라코 굿즈를 꺼내 나눠주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번 전시엔 작가의 2010년 그림도 같이 걸렸다. 지금과 달리 어둡고 으스스한 작품 분위기가 나온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작품이 그려졌을 당시 일본 사회의 뒷이야기-일본의 기독교와 불교가 섞인 종교 이야기, 헬레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이 그 해답이었다. 1시간 가량 이어진 '아르떼X스페이스K 나이트 뮤지엄'에선 예술을 통해 히라코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와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한 관람객은 "단순히 작품과 작가 설명뿐만 아니라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작가가 살아온 삶, 생각들을 알게 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고 했다. 실제 전시장 한가운데를 차지한 3.5m짜리 '트리맨' 조각뿐만 아니라 그 밑에 놓여진 포도, 배 등 소품 하나 하나까지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보라색 바나나 등 과일에 히라코가 이상한 색을 칠한 이유는 '결국 과일도 인간의 입맛에 맞춰서 개량된다'는 사실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식물을 향한 무분별한 인간의 침범이 결국 이상한 색의 과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죠."전시관의 2층으로 올라가면 1층 작품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작은 구멍이 있다. 미술관의 문을 닫고 소규모 인원만 초청해 진행하는 나이트 뮤지엄의 특성상 전시관에 다른 관객들이 없기 때문에 텅 빈 전시관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몇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날도 작게 난 창 앞에 함께한 나이트뮤지엄 관객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나가는 출구엔 히라코가 직접 만든 '트리맨' 피규어를 가져갈 수 있는 대형 나무 핀볼 게임이 있었다. 줄을 잡아당기면 위에서 캡슐이 떨어지고, 캡슐이 핀볼 게임기 속 구멍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캡슐 하나를 더 받을 수 있다. 이날 나이트뮤지엄을 찾은 관객들도 게임에 열중했다. 경기도에서 온 한 커플은 단 한번의 도전으로 구멍에 캡슐을 넣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스페이스K 관계자는 "주말엔 구멍에 캡슐을 넣기 위해 20회까지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며 "100번을 굴리면 3번 정도 들어가는 확률이다"고 덧붙였다. 스페이스K 전시장 정문 밖에는 트리맨
이 큐레이터는 스페이스K 정문 밖 마당에 세워진 트리맨 작품을 가리키며 "지난해 프리즈 런던에 같은 작품이 출품되며 저 작품을 보려 찾는 관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유이치 히라코가 내부와 외부에 그린 두 점의 벽화도 만날 수 있다. 히라코는 지난해 12월 영하 15도의 추운 겨울에도 스페이스K를 2번이나 찾아와 이 벽화를 그려줬다. 히라코는 최근 에르메스 홍콩과 콜라보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 소식이 보도된 이후 대만, 홍콩 드 중화권에서도 전시를 많이 찾는다.고 말하며 최근 히라코의 활동까지 들려주며 설명을 마쳤다. 전시는 2월 4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