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도서관을 지었다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입력
수정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오빠와 언니들은
32. 4.19혁명 기념도서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중략)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이 시는 1960년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학생의 시다. 당시에는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던 시절인데 정동에 있던 덕수국민학교와 함께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는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였다.
4.19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 등 고등학생들에 의해 시작됐다. 일요일인 이날은 민주당 장면 후보의 선거 유세가 대구 수성천변에서 예정돼 있었다. 일요일에 등교 명령을 내려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화근이다. 경북고를 비롯한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오에 반월당에 집결해 매일신문사를 거쳐 도청으로 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것이 4.19의 시작인 ‘2.28 민주 운동’이다.
총유권자 수 11,196,490명, 이승만 대통령 후보 지지표 9,512,793(84.96%), 부통령 후보 이기붕 지지표 8,220,587표(73.42%)로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입후보 등록 방해, 유권자 협박, 공개투표, 부정개표 등이 대규모로 자행된 것이다.
4월 18일 정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총궐기해 세종로, 태평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이 평화 행진을 하며 귀교하는 도중, 대한 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로부터 피습을 당한다. 대구와 마산의 고등학생으로부터 촉발된 시위가 대학생들의 시위로 커졌다. 구호는 ‘부정선거’에서 ‘독재 타도’로 바뀌었다. 시민들까지 합세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가고, 일부는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집으로 향했다.이기붕의 집은 서대문 밖에 있었다.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아래 4.19 혁명도서관이 그의 집이 있던 곳이다. 그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 17대손으로 1896년 괴산에서 태어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 이기붕은 양녕의 동생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이기붕의 증조부 이회정이 흥선대원군을 지지해 임오군란 이후 역적으로 몰려 1883년 사사되자 조부가 괴산으로 내려가 터를 잡고 살았다. 이기붕이 소학교에 다닐 때는 매우 병약해 죽을 아이를 왜 학교에 보내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에 선교사 무쓰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일생의 은인 두 사람을 만난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이승만과 10살 연하의 박마리아다. 박마리아의 집안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머니가 33인 중 하나인 정춘수의 집안 일을 도운 것이 인연이 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 후 이화여전 강사로 일하던 박마리아와 결혼했지만 이렇다 할 직장이 없어 10년간 백수로 지낸다.
이기붕은 1948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취임, 1949년에는 서울시장이 된다. 6.25 전쟁 발발 후, 한강철교를 끊을 당시 서울시장이 이기붕이다. 그는 서울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그가 국민들에게 강직한 모습을 보인 것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서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이 일로 사퇴하자 바통을 이어받은 이기붕은 사건을 재조사해 이미 무혐의 처리 된 주요 간부 5명을 사형에 처한다. 일사부재리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국민들은 환호했다. 전쟁 상황에서 아군 장교들의 부패로 5만명 이상의 군인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동상에 걸려 죽은 사건이었다. 이기붕은 이 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으로 공직을 마쳤다면 국민들에게 강직하고 엄정한 공직자로 기억됐을 것이다.
운명의 1960년, 큰 변수가 생겼다.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위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갔다가 돌연 사망한다. 대통령 후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당은 부통령 자리까지 욕심을 냈다. 부정선거로 나라가 아수라장이 됐다.
4월 25일 성난 군중들이 ‘서대문 경무대’라 불렸던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갔다. 80년 전, 1882년에도 성난 군인들이 이 길을 메웠었다. 그때는 학생, 시민들이 아니었다. 배고픈 군인들이 서대문을 나와 이 비탈길 아래 경교를 건너 경기감영(적십자병원)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전 선혜청 당상이자 현 경기관찰사인 김보현을 잡기 위해서였다.
1960년의 성난 군중들은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가 가재도구를 꺼냈다. 미제 냉장고를 뒤지니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잘 익은 수박이 나왔다. 군중들은 더욱 분노했다. 서대문 밖 비탈길에 가재도구를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임오군란 때 관찰사 김보현이 도망가 허탕을 친 것처럼, 1960년의 군중들도 이기붕을 잡지 못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 친하게 지내던 경기도 포천의 강영훈 6군단 사령관에게 피신했기 때문이다. 이기붕 일가는 이틀 만에 경무대로 돌아온다.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경무대 별실 36호에서 이승만의 양자이며 이기붕의 장남인 육군 소위 이강석은 수면제를 먹고 잠든 생부와 엄마 박마리아, 동생 강욱을 리볼버 36구경 권총으로 차례로 쏘아죽이고 자신도 머리와 가슴에 두 발을 쏜다. 김치열 서울지검장은 “유서나 일기는 없고, 옷과 약간의 일용품만 남아있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후 자살이냐 타살이냐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강석이 자기 가슴에 총을 쏘고 나서 다시 자기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사건은 서둘러 마무리됐다. 권총의 지문 감식도 없는 허술한 수사였다. 3.15 부정선거의 모든 책임을 이기붕에게 뒤짚어 씌워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피어났다. 공교롭게도 그날 미국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을 수락한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7일부터 ‘4.19혁명 유족회’가 이 집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기붕 일가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한 뒤였다. 이듬해 일어난 5.16 후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희석하고자 이곳에 도서관을 지었다. 1964년 4.19 기념 사설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2000년 4,19혁명 기념 도서관으로 다시 개관했다. 4.19로 숨진 젊은 영령들의 못다 이룬 꿈을 후세 젊은이들이 배우고 나라를 건실하게 이끌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 하여 역적의 집은 허물고 그곳에 구덩이를 파 연못을 만들었다. 이기붕의 집은 파가저택이 아니라 도서관이 됐다.
혼돈의 시대에 혁명정신도 퇴색돼 간다. 이곳을 지나며 그날의 외침을 되새겨 보시길…<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