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면서 온종일을 보내면 불안한 삶이 견고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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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정민의 세상을 뒤집는 예술읽기새해가 밝았습니다.
- 시리즈 시즌 1
“지옥은 대체 어디인가”에 대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인생의 낭비를 막는다
새로이 한 해가 시작되면 다들 올 한해 나의 삶이 어떠할지 궁금해집니다.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해 소극적으로는 운세어플을 깔고 들여다보거나, 소심하게 사주카페를 찾거나, 과감하게 역술인을 찾아가기도 하지요. 아마 어떤 경우에도 싫은 소릴 듣지는 않을 겁니다. 새해니까 싫은 소리도 좋게 전달될 테고, 또 쓴소리를 듣더라도 자기위안의 희망회로가 돌아갈 테니까요. 이런 시기에 저는 오히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교수 책 속 말을 다시 새깁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또 하루를 소중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처럼, 새해 벽두에 또 한 해를 ‘의미 있게 살아보고자’ 죽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 뒤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면. 즉 영원히 잠들면 좋겠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죽음 뒤에 기다리는 단단한 세계관을 되새겨왔습니다.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았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착한 삶 혹은 악한 삶이란 것이 예쁜 얼굴과 안 예쁜 얼굴만큼이나 애매합니다. 단 한 점의 못됨도 허용하지 않는 100% 순수한 착함이 과연 있을까도 애매하지만, 한 사람이 태어나 80년을 산다 할 때 얼마의 시간을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더구나 악함은 계산이 몹시 복잡하지요. 평생을 교회나 성당, 절이나 신전을 찾아 속죄를 구할 경우 악함의 정도가 얼마만큼 차감될지 계산방식이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죽음 뒤의 처지가 애매하여 착함과 악함의 대차대조표를 불안하게 정산하는 대신, 만약 당신은 모월모일에 죽어 지옥에 갈 거라도 누군가 화끈하게 알려주면 어떨까요?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지옥에 가기로 정해진 거 남은 시간 동안 온갖 악행을 저질러 보자며 통큰 빌런 이 되진 않을까요?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의 첫 장면은, 지옥행이 예정된 한 남자가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를 데려가 단죄를 하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육신은 처참한 형태로 남고 영혼은 어디론가 데려가 알 수가 없는 상황, 그래서 더 두렵고 무서운 분위기로 시작되죠.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오히려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지옥행을 ‘고지’받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현실에서 죽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옥을 경험하게 되죠. 평범한 사람도 일단 지옥행을 고지 받는 순간, 지옥행이 마땅한 사람으로 마녀사냥을 당하고, 이상한 종교단체가 생겨나 사람들을 통제하고 ‘넌 지옥행이 마땅한 인간이다’라며 가스라이팅 하죠.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이 지옥행을 고지 받을까 불안해하며 공포에 떨고, 죽지도 않은 산목숨들은 이미 죽은 자와 다름없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며 삶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착하게 산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하게 산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범세계적 통념은, 결국 ‘착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죽음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천국과 지옥행이 맞춤형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랜덤박스처럼 주어지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불운을 피해가기 위해 착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실 지옥이 만들어 지는 거죠.
그러다 갓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린 죄(?)밖에 없는 아기도 지옥행을 고지 받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맹목적 마녀사냥이 잘못된 것임을 각성한 사람들이 반격을 시작하고 <지옥>시즌1의 이야기가 일단락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볼까요? 이 시리즈 제목이 <천국>이고 지옥행이 아니라 천국행을 고지 받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요? 천국에 갈 날이 정해져있는 사람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타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뿜뿜 퍼트려, 이승이 곧 천국처럼 변할 수 있을까요.
죽음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오고,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그 결과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르는 상황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애써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옥>에서도 그렇지만 설령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예고되었을 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도 자기 죽음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는데 말이죠.
‘죽음을 기억하라!’,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우쭐대지 마라, 그래봤자 인간이다’, 또는 ‘겸손해라’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결국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을 운명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잘 살라’는 의미입니다.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이 그저 그런 일상으로 여겨지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오늘을 맞는 일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 김영민교수의 말처럼 어느 한적한 곳에 들어가 각자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게 쉽지 않다면 시리즈 <지옥> 시즌1을 정주행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가 소중한 까닭은 내게 남은 날이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식상한 문장이 갑자기 울컥하며 와 닿을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