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 찬반토론] 선거 전 290만 명 신용 사면, 금융 발전에 도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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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또 ‘신용 사면’에 나섰다. 2000만 원 이하 대출자 가운데 제때 이자를 갚지 못해 금융거래가 원활하지 못한 취약계층을 상대로 일정 기간 안에 빚을 다 갚으면 연체 기록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통상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석 달 이상 연체하면 금융회사와 신용평가회사에 해당 내용이 공유된다. 이렇게 신용불량자가 되면 이후 대출받을 때 금리 부담이 늘어난다. 나중에 돈을 갚아도 최장 5년간 금융거래에서 각종 불이익(금전적 손해)을 당한다. 금융 부실을 예방하고 신용 사회로 가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이런 규정·관행을 무시하고 연체 기록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서민 지원이라지만 선거를 앞두고 나온 조치라는 점 때문에 선심 정책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되풀이되는 신용 사면, 금융 선진화에 도움 되나.
이런 사면은 금융회사 부실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2000만 원 이하의 소액 대출자 중 연체자는 290만 명 정도다. 이들이 단지 제때 못 낸 이자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더 많은 이자를 부담하게 돼 이자 납부를 완전히 포기하면 금융회사는 그나마 이자도 못 받는다. 이렇게 해서 신용불량자가 늘어나고 자립 의지까지 꺾이면 결국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 신용 사면은 적은 비용으로 금융시스템이 돌아가게 하고, 복지 부담도 줄일 수 있다.
빈번한 신용 사면은 금융 이용자, 특히 사회에 막 나온 젊은 금융소비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신용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출 다 줄이고 자기 대출금을 제때 갚은 건전한 대출자에 대한 역차별도 된다. 시점도 좋지 않다. 하필 중요한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나온 조치다. 표를 얻기 위한 인기 영합 정책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빈번한 신용 사면은 금융 선진화와 거리가 멀다. 관치금융과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찬성] 장기 불황에 서민 어려움 가중…신용 회복으로 자립하면 '지원 비용' 줄어
경제성장률이 1~2%대로 뚝 떨어진 장기 저성장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소비 활성화 등 내수 진작을 펴고 투자 확대 유인책도 마련하지만, 성과가 잘 안 나타난다. 한국은행도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서 우회적으로 서민 취약계층 금융 지원에 나섰다. 그래도 경제 취약층의 어려움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세계적 고물가로 양극화도 심화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서 저소득층의 어려움은 날로 커진다.정부가 저소득 서민을 위한 여러 지원 정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좀 더 현실적인 대책은 금융 활동에 애로가 있는 금융 취약층의 정상 대출을 가능하게 해주고 가능하면 이자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또한 신용카드 이용에 지장이 없도록 해주면 좋다. 소액 연체자들은 대출금을 떼어먹기로 작정한 경우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제때 갚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급작스러운 실업으로 소득이 급감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 등으로 지출이 늘어나 대출을 받았지만 수입이 적은 데다 자산이 부족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어려우니 돈은 더 필요하고, 갚을 돈이 없어 납부일에 맞춰 이자를 내지 못하니 더 많은 이자를 물어야 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조금만 도와주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층에겐 정부가 나서서 저신용의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 형사 범죄자가 전과 때문에 취업 등의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고 다시 범죄에 노출되는 악순환과 비슷하다.이런 사면은 금융회사 부실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2000만 원 이하의 소액 대출자 중 연체자는 290만 명 정도다. 이들이 단지 제때 못 낸 이자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더 많은 이자를 부담하게 돼 이자 납부를 완전히 포기하면 금융회사는 그나마 이자도 못 받는다. 이렇게 해서 신용불량자가 늘어나고 자립 의지까지 꺾이면 결국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 신용 사면은 적은 비용으로 금융시스템이 돌아가게 하고, 복지 부담도 줄일 수 있다.
[반대] 신용은 각자 애써 쌓아가는 성과물…정부 개입이 관치금융·도덕적 해이 조장
현대는 신용 사회다. 금융은 특히 신용을 전제로 발전한다. 개인의 신용은 각자가 경제활동으로 지속해서 쌓아가는 기록이고 성적이다. 신용 평점이 있기에 당장 현금이 수반되지 않는 신용카드도 발급돼 경제활동을 촉진한다. 대출 역시 신용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금융회사 대출금은 다른 누군가의 귀중한 저축금이다. 금융회사는 이를 잘 관리해서 예금자에게 이자와 함께 돌려줘야 할 책무가 있다. 가난한 저개발국에는 신용 기반 금융거래가 부족하고, 고도의 선진국일수록 신용 사회인 것은 수십, 수백 년 신용을 축적·관리해온 결과다. 이처럼 사회적 자산인 신용 제도의 근간을 정부가 흔들어선 안 된다.신용 대사면을 쉽게 하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제때 대출금을 갚은 사람, 카드 사용을 분수에 맞게 절제해 한도와 결제 기일을 잘 지켜온 이들의 노력에 대한 가치는 줄어든다. 제때 안 갚아도 불이익이 없고, 때가 되면 사면도 해주는 데 왜 자기신용을 지키려 노력하겠나. 한마디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정부가 나서서 부추기는 꼴이 된다. IMF 외환위기 시절처럼 나라가 부도날 상황이거나 코로나19가 발생한 초기에는 비상 시기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국가적 경제위기에서는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위기 국면이 아니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경기 순환상의 불경기일 수도 있고, 성장 동력이 약해지면서 나타난 구조적 불황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용 사면을 쉽게 하는 것은 금융시스템의 핵심 원칙을 흔드는 꼴이다.빈번한 신용 사면은 금융 이용자, 특히 사회에 막 나온 젊은 금융소비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신용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출 다 줄이고 자기 대출금을 제때 갚은 건전한 대출자에 대한 역차별도 된다. 시점도 좋지 않다. 하필 중요한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나온 조치다. 표를 얻기 위한 인기 영합 정책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빈번한 신용 사면은 금융 선진화와 거리가 멀다. 관치금융과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 생각하기 - 소상공인 이자 감면에 뒤이은 선심…선거 직전 나온 게 문제
문재인 정부 때 비슷한 내용으로 중소사업자 신용도에 정부가 개입한 적이 있다. 신용도에 따라 대출이자가 달라지는 데 좋은 신용도 적용, 즉 이자 감면을 정부가 강요해 적지 않은 논란이 됐다. 윤석열 정부도 연체 기록 삭제로 신용 사면에 나섰다. 서민 지원의 취지는 이해되지만, 개인과 개별 기업의 신용은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고, 오랜 기간 축적해간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신용등급은 각 금융회사와 신용평가사가 독립적으로 매긴다. 금융 선진국에서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돈을 빌려주고 카드 발급도 결정한다. 정부가 은행의 팔을 비틀어 사면하면 관치금융으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꼴이 된다. 코로나19 이후 고물가·고금리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서민을 지원하려면 먼저 정부 돈(예산)에서 지원하는 게 순서다. 세금 지원, 규제 철폐 등 다른 방법도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다. 선거 직전의 조치라는 게 더 문제다.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